창비, 2018
엄선정이 활짝 웃었다. 남자애들은 항상 제멋대로 굴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옳다고 뻑뻑 우겼다. 그게 아니라고 또박또박 말을 해 줘도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떼로 몰려다녔다. 하지만 종수는 그러지 않았다. 엄선정이 의견을 말하면 언제나 잘 듣고 따라주었다.(64p)
"왜 네가 나를 지켜?"
"어?"
"왜 힘들게 나까지 지키느냐고. 나는 내가 지킬 테니까 걱정 마. 그래서 지금 권투도 배우잖아. 잽잽."
"어."
(93p)
"나 그만할래."
"영어 시험 본다잖아. 지금부터 공부해야......"
"공부 말고. 너랑 사귀는 거 그만한다고."
"뭐라고?"
엄선정은 자기가 이종수 말을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종수가 같은 말을 또 한 번 했다.
"이제 너 그만 만나고 싶어."
엄선정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따. '기껏 문제집 만들어서 가져왔더니 그만 만나자고?' 하는 생각에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었다.
"왜? 왜 그만 만나고 싶어? 네가 뭘 했는데? 네가 한 게 뭐 있다고 날 그만 만나고 싶어!"
엄선정이 이종수를 똑바로 쏘아봤다.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은 없는데, 난 그냥 널 좋아했어."
"......"
"근데 넌 나한테 계속 화냈잖아."
이종수 말은 사실이었다. 엄선정은 요즘 계속 화가 나 있었다. 엄마한테 혼난 것도 화가 나고, 이종수가 이렇게나 공부를 못하는 것도 화가 났다. 엄선정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왜 나만 이종수를 위해 문제집을 만들고, 왜 나만 이종수를 위해 문제집 채점을 해 주고, 왜 나만 이종수를 위해 모르는 문제들을 설명해 줘야 해?'하는 마음이 들어 자꾸만 억울했고, "이종수, 너는 왜 나를 위해 아무 것도 안 해 줘?"하고 큰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종수가 그동안 자기도 뭔가를 쭉 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난 그냥 널 좋아했어.
이종수가 농구공을 텅, 텅, 튕기며 멀어져 갔다. 엄선정은 영어 문제집을 손에 든 채 농구대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1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