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디 Jan 20. 2021

Best memories of my life

나의 기억 스케치

오빠 때문에 내 머리에 뿔 안 달린 사진이 없다


1. 어릴 때 난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읽을 때면 밤에 혼자 자는 걸 무서워했다. 그럴 때면 꼭 오빠 방에서 자곤 했는데 그 좁은 침대에 오빠와 내가 굳이 끼어서 잤다. 내가 오빠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오빠가 밤에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 옛날 오빠 방 천장에는 야광 스티커가 붙여 있었는데, 오빠가 천장에 있는 스티커를 가리키며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게는 별자리 이야기, 어쩔 때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무서워서 온 애한테 더 무서운 이야기?) 등 이야기 소재는 다양했다. 지금 오빠랑 한 침대에서 같이 자라고 하면 완강히 거부하겠지만, 한때는 오빠랑 한 방에서 같이 자는 게 참 좋았던 시절이 있다.


2. 초등학교 때 4교시 수업만 하는 수요일이나 토요일 낮에는 집에 일찍 돌아와 할머니랑 같이 점심을 먹곤 했다. 보통 할머니와 식사할 때는 호박잎에 된장 쌈 싸 먹거나 누룽지를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운이 좋은 날이면 할머니는 비빔국수를 해주셨다. 소면에 김치 송송 다져놓고 양념장 만들어서 무치는 국수가 아니라, 소면에 고추장과 참기름, 설탕으로만 간을 하는 그런 비빔국수였다. 할머니는 항상 오른손에 비닐장갑을 끼시고 비빔국수를 다 무치면 손녀딸 먼저 맛보게 해 주셨다. 물론 비빔국수도 맛있어서 좋았지만, 부엌에서 쪼그려 앉아 비빔국수를 먹으며 할머니가 해주시는 재미난 이야기 듣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유익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셨을 테지만, 나에게는 비빔국수 먹으며 들었던 할머니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는 조선시대 왕 이야기, 할머니 옛날이야기 (할아버지와의 결혼 스토리, 엄마 어릴 적 이야기) 등 어린아이의 흥미를 돋울 재미난 이야기만 골라서 해주셨다. 지금도 가끔 할머니의 비빔국수가 생각날 때가 있는데, 이번 주말에는 꼭 할머니 집에 놀러 가서 할머니표 비빔국수 먹어야겠다. 


초1의 나 (맨 아랫줄 왼쪽 두 번째). 그때 유행하던 츄리닝을 입고, 동물 모자를 쓰고. 루돌프 모자를 쓴 친구가 소윤, 토끼 모자를 쓴 친구가 효진.
에버랜드를 밥 먹듯이 가던 때. 나의 왼쪽이 소윤, 오른쪽이 효진. 둘 다 브이 하는 중.


3. 어릴 때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잔다는 건 아주 특별한 날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친구의 생일 때나 엄마들의 모임이 있을 때, 이런 특별한 날에만 친구들과 함께 파자마 파티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놀던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특히 파자마 파티를 하기 좋아했던 친구의 집이 있는데, 바로 소윤이의 집이었다. 소윤이는 나와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소윤이가 6학년 때 미국에 가기 전까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소윤이 아줌마는 특히 소윤이 친구들을 집에 불러 함께 노는 것을 허락해주시는 관대하신 분이셨다. 소윤이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면 아줌마는 항상 칠리소스를 뿌린 닭봉 구이를 해주셨고 우리는 꼭 밤에 초콜릿 퐁듀에 마시멜로와 참깨스틱을 찍어 먹곤 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소윤이 집에서 함께 파자마 파티하던 친구들은 효진이, 고은이, 한나였던 것 같다. 여기서 웃긴 팩트 하나는 이때 같이 놀던 친구들 중 내가 아직도 연락하는 친구는 효진이 하나이지만, 엄마들끼리는 아직도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정작 아이들은 연락 안 하고 살지만 엄마들은 가끔 분당에서 만나 브런치도 먹고 카페도 가는 그런 친한 사이라는 게 웃프다.


오빠랑 할머니가 미국 가던 날 찍은 사진.
저땐 브이가 세 손가락으로 하는 줄 알았나 봄
이 무렵 찍은 사진에 나는 다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


4. 내가 7살 때 칠공주의 Love Song이 한창 유행했는데, 그때 난 그 노래의 간주만 흘러나와도 홀린 듯 춤추곤 했다. 나의 7살은 그리 행복한 기억만 있지는 않다. 오빠가 영어 공부하러 미국 이모집에 갔을 때인데 할머니가 보호자로 따라가셨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 기억으로 6개월은 넘게 떠난 걸로 안다. 할머니 없이는 하루도 살아본 적 없는 내게 할머니 없이 유치원 다닌다는 건 정말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난 할머니가 미국에 간 게 엄마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7살 때 찍은 사진에 난 다 입술을 내밀고 뾰로통해 있다. 어린 내게 할머니가 떠난 게 엄청난 트라우마였는지 이때 꾼 악몽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밤에 일어나서 몇 시간 동안 운 기억이 있다. 몇 개월 동안 삐져있는 날 풀어주려고 엄마가 갖가지 노력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매일 Love Song을 틀어준 거였다. 추운 겨울 오빠가 없는 오빠 방에서 엄마가 컴퓨터를 하고 난 오빠 방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엄마가 컴퓨터고 Love Song 가사를 뽑아 줬다. 그 노래가 어찌나 좋았던지 한동안 그 노래만 부르고 살았다. 얼마 전 슈가맨에 칠공주가 나와 이 노래를 불렀었는데 옛날의 촉촉한 기억도 나고 싱숭생숭했다. 


5. 예전부터 평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회사 출근하는 게 습관이 됐던 아빠는 주말에도 일찍 일어났다. 나 어릴 적 아빠는 주말 아침마다 나를 제일 먼저 깨웠다. 아빠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는 이유로, 그리고 내가 제일 아빠를 잘 상대해줬기 때문. 아빠가 나 깨울 때마다 다리 쭉쭉이를 해주며 깨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무다리를 쭉쭉 펴주면서 쭈땡 (내 애칭) 다리 길어져야 한다고 애정 어린 손길로 아빠가 날 깨웠던 게 참 달콤한 기억이다. 요즘은 아빠는 날 깨울 때 발바닥을 간질이면서 깨운다. 참 재밌는 아빠다. 나만 그런 거 아닐 테지만, 어릴 때부터 특히 아빠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기억이 나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6. 내가 인도에 있을 때 이야기다. 인도에서는 주재원 가족들이 한 동네에 거의 모여 살았다. 내가 살던 빌라 단지 이름은 샹그릴라였다. 샹그릴라에는 세 가족이 모여 살았는데 어쩌다 한국 먹거리가 생기면 서로 나눠먹고 쉬는 날에는 함께 모여 담소도 나누고 서로에게 이로운 이웃이었다. 인도에서 놀 거리가 딱히 뭐가 있으랴. 그래서 샹그릴라 세 가족은 한 달에 한번 우리 집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다. 우리들이 얼마나 바비큐에 진심이었냐면 바비큐를 위해서 아빠들이 돌을 깎아서 돌판을 만들 정도였다. 우리가 인도를 떠날 즈음에는 돌판에 고기를 하도 구워서 돌판이 열에 의해 깨졌다. 바비큐 파티를 하는 날이면 아빠들은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엄마들은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했다. 고기는 당연 부식으로 받은 냉동삼겹살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야외캠핑장에서 바비큐 하는 것과 비슷했다. 샹그릴라 바비큐 파티의 핵심은 바비큐를 구워 먹고 모든 가족이 마당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기는 데 있었다. 그나마 내가 주재원 자녀 중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아서 어른들 노는 데 항상 내가 껴있었다. 그때 어른들과 어울려 논 기억 덕분인지 난 지금도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불편하지 않다. 타지에서 기댈 데라고는 한국인 가족밖에 없던 처지가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그때는 그게 나름의 재미였고 위로였다. 아직도 더운 날의 밤이 되면 인도 우리 집 마당에서 불 피우고 바비큐 하며 세 가족들과 공유했던 기억의 잔상이 뚜렷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