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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Aug 01. 2023

이혼하고 싶으세요?

눈꽃 에세이 2

이혼하고 싶으세요?



                   

 “그래서 이혼하겠다는 거야아님 이혼하고 싶다는 거야?”

 간만에 만난 여고 동창 친구는 벌써 한 시간 넘게 힘든 결혼생활을 토로하고 있다. 남편이 너무 효자라 퇴근 후엔 거의 매일 시어머니께 들러 한 시간이나 수다를 떨고 오고, 자기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입맛이 더럽게 까탈스러우며, 자기가 샤워를 하면 꼭 자는 척을 한다는 등등의 소소한 불만을 듣고 있자니, 남편보다 너의 갱년기 증상이 심한 거 같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남편이 때리냐?”

 “아니.”

 “바람 피우냐?”

 “아니.”

 “도박은?”

 “안 하지.”

 “생활비는?”

 “월급이야 따박따박 내 통장에 입금되지.”

 “그럼 그냥 살아. 앞으로 네가 로또 될 확률이 없다면. 이혼하면 지금 네가 사는 30평대 아파트 둘로 나뉘서 15평에서 살게 될 거고, 국민연금 200만 원 나눠서 100만 원이 너의 노후 자금이 될 텐데. 그렇게 살 자신 있음 하구.”

 너무 현실적인 답변에 친구는 처음엔 좀 새초롬한 표정을 짓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하긴 지금까지 길들여 놓은 거 아까워서 내가 데꾸 산다.” 하면서 밝은 표정이 되어, 쿨하게 밥값에 찻값까지 계산하고 돌아갔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혼하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스스로 찾았기 때문일까. 나는 친구가 절대 이혼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냥 반농담의 조언을 해주었지만, 진짜 이혼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지인들은 돌싱이 많은데 유독 여고 친구들 중엔 나만 이혼을 했다. 젊었을 땐 보이지 않는 경쟁심들이 있어서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자랑삼아 얘기하더니, 나이들을 먹으니 이젠 힘든 속내 같은 것들을 이혼한 나에게 많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각의 가정사를 제일 많이 알게 되었고. 뒤늦게 사이버 대학에서 공부한 상담심리도 곁들여 나는 ‘선무당’ 이혼 상담사가 되었다. 30대의 나에게도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혼하지 않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거 같다. 이혼을 하고 내가 깨닫게 된 것은 30대의 나는 그 누구랑도 한 번은 이혼했겠구나, 하는 통찰(?)이다. 친구들 남편들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다른 놈들하고도 못살았겠구나, 하는 웃픈 현실을 자각했다.       

   

 둘째를 낳고 열흘 만에 살고 있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친정아버지와 사업을 하던 남편이 나에게 의논하지 않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일하던 직원분이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로프가 끊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원청에서 남은 공사대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사망자 가족에게 산재보험을 받게 해 주었고 집은 날아갔다. 결혼 전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작은 빌라의 옛집으로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다시 들어갔다. 남편은 처가살이를 하기 싫어했지만 아이를 맡기고 당장 어떤 일이라도 해야 되는 나에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은 기어코 시댁의 도움을 받아 혼자 집을 얻어 나갔다. 나에게도 같이 나갈 것을 권유했지만, 둘째가 백일이 된 뒤부터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방문교사로 일을 시작했기에 따라갈 수 없었다. 아니 가기 싫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틀어졌고 남편은 아무도 없을 때 집에 와서 짐을 챙겨 나갔다. 그리고 우리에게 2년 넘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는 어떤 정신으로 살았을까?

 백일 지난 아이를 떼어놓고 회원 집으로 방문수업을 갔는데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모유가 가슴팍에 얼룩으로 배어났을 때 낯선 아파트 계단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었다. 자동차 트렁크에 맥주를 넣고 다니면서, 일이 힘들 때마다 집 앞 주차장에서 낮동안 부글부글 뜨거워진 맥주를 혼자 들이켰다. ‘이곳이 지옥이라고 한들 네가 우리를 버리고 그렇게 떠날 수 있는 거니.’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괴로움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그런 생활이 3년쯤 되었을 때 남편은 자기 잘못을 용서해 달라며 다시 살림을 합칠 것을 제안했고, 아이들을 위해서 한 번은 다시 시작해 봐야 후회가 없을 거란 생각에 친정 옆 아파트 단지에 집을 구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남편의 지난 3년의 시간 속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았던 남편의 여자가 내게 먼저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돌싱이라고 해서 만났고 결혼하기로 했다고... 갑자기 헤어지자고 해서 너무 힘들다며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이 사줬다는 그녀의 리미티드 에디션 명품백을 바라보며, 옆구리에 실밥이 터진 3만 원짜리 가방이 내 신세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티비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머리채를 잡지도 육두문자를 날리며 싸우지도 않았다. 우는 여자를 보면서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덤덤해지면서 평온해졌다. 한 오라기 미련도 없이 정리할 수 있는 명분이 주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뒷덜미를 낚아채는 듯  찜찜한 기분의 실체를 알게 된 후련함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우는 여자를 위로하면서이것이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우리는 금방 이혼하지 못했다아이들을 핑계로새로 얻은 집을 핑계로양가 부모들을 핑계로감정은 서로 다 메말라 버렸지만부모로자식으로 남은 의무를 떨쳐내지 못해 서로 감정에 생채기를 내며 미워하며원망하기를 몇 년 더 하다가 끝내 이혼했다.           


 

 이혼한 지 십 년이 넘은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그 시절 남편도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이제는 든다. 공부만 하다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시작한 사업은 망했고, 나는 그의 힘든 마음을 이해해 주기는커녕 얼음장처럼 차갑게만 굴었다. 불편한 처가살이도 너무 힘들었겠지. 30대의 젊은 남자가 혼자 몇 년씩 나가서 살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충분히 든다. 그렇게 서로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헤어지고 나서 관계가 좋아졌다. 이혼 전 사업을 할 때는 생활비 받을 생각도 못했는데, 이혼하고 꼬박꼬박 보내주는 양육비가 고마웠다. 같이 살 땐 당연한 의무라고 여겨 들지 않았던 마음들이 남이라고 생각하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얼마 전 저녁을 먹으면서 고2가 된 첫째 딸에게 내가 물었다. “너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나 그 사람 부모님이 네가 이혼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결혼 반대하면 어쩔 거야?” 했더니 아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며 “엄마, 결혼은 하루 이틀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서로 평생을 힘들 때나 아플 때나 함께 한다는 약속인데,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결혼하지 않는 게 맞는 거 아냐? 난 그런 사람들을 걸러 낼 수 있는 이런 필터링을 가진 내 조건이 좋아.” “맞아, 그런 사람들하고는 아예 인연 안 맺는 게 낫지.” 둘째까지 맞장구를 쳤다.

 이런 현명한 아이들이 내 딸들이라니(수학 시험 따위 좀 못 보면 어떠하리ㅋ) 난 이제 딸들이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모의 이혼 따위가 딸들의 성장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에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이혼에도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라고 본다아이 때문에돈 때문에사람들의 시선 때문에불행을 감내하면서도 이혼하지 않는다면그건 그런 조건들을 붙여서라도 가정을 유지하고 싶은 내 안에 다른 미련이 있다는 것이다부모의 이혼으로 아이들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히 고민해야 되는 부분이지만아이들은 영원히 아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기 때문에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매일 싸우고 서로 쇼윈도 부부로 살면서 공간을 셰어 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난 이혼 예찬론자도 아니지만 이혼이 인생의 흠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그것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일깨워 주었다나의 이혼을  실패라는  단어로 말하지 않고 더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해 주는 사람아직도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지금 내게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듯이 사랑이 끝난 자리에 다시 사랑이 싹을 틔운다.         


 이혼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난 인간으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 내가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난 결혼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만날까 생각하기 전에 네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라고...

 이혼이라는 선택이 행복이나 불행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이혼해서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결정 이후의 결과를 내가 어떻게 다루는가는 온전한 나의 몫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행복하기만 한 삶은 없다. 인생이라는 집에 가끔 찾아오는 행복이라는 손님이 있을 뿐.

 그 손님에게 문을 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순전히 나의 선택이다.             


           

 (두 번째 에세이 끝)     



- 웹진 <숨 빗소리>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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