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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Aug 03. 2023

꼰대의 변명

눈꽃 에세이 4

꼰대의 변명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첫째 딸이 중3 때 어느 날 저녁 먹는 자리에서 열을 올렸다.

 “아니 요새 애들은 왜 그리 개념이 없어?” 자기도 요즘 애들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겼지만, 짐짓 아닌 척 내용을 물어보니 이야기는 이랬다.

 학교 방송반인 딸이 이제는 선배가 되어 후배를 맞게 되었는데 지원을 한 1학년 후배들이 아주 싹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방송반 지원 면접 때 선배들 눈에 들려고 시키는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서 했는데 이번 아이들은 전혀 그런 성의가 없을뿐더러 선배에 대한 예의도 없다고 분노했다.

 “우리가 특기가 있냐고 물었더니 노래래. 그래서 한 소절 불러보라고 했더니 여기는 방송반 면접인데 왜 노래를 해야 되냐고 따지는 거 있지. 그리고 어떤 애한테 만약 선배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겠냐고 했더니, 뭐 그래도 선배님이 시키시는 일이니 하겠다고 해야 점수를 많이 받겠죠? 그래도 전 안 할래요, 라고 하는 거 있지. 진짜 완전 대박이지 않아?”

 그 얘기를 들은 두 살 아래 둘째 딸이

 “뭐야 언니, 애기 꼰대야?”

 하며 언니를 핀잔줬다.

 “야! 꼰대가 아니라 우리 때는 춤, 노래만 한 줄 알어? 내 친구 중엔 등장할 때 앞 구르기 하면서 들어온 애도 있었어. 어린 것들이 절실함도 개념도 없는 거지. 백 미터 밖에서도 선배 보면 구십 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는데, 지금 애들은 같이 손을 흔드는 거 있지. 개 황당이야.”

 애 늙은이 같은 둘째도 자기가 무슨 후배들의 대변인인 양 반박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게 맞나? 누군가 고리를 끊어야지. 그게 갑질 아니고 뭐야”

 첫째도 지지 않았다.

 “나도 선배 되면 그런 대접받을 거니까 억울하고 짜증 나도 참았거든. 고리는 우리가 끊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끊는 거지, 그걸 누가 강요 할 수 있어? 누구는 바보라서 참은 줄 알어? 지금까지 참은 게 억울하다고.”

 나는 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했다. 이성적으로는 둘째의 말이 맞고 그렇게 사회가 변해 가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 조직에서는 선배가 되고 나이 어린 후배들과 일을 하거나 교류를 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면서 첫째가 느낀 억울함을 나 또한 느낀 적이 많다. 시집살이 독하게 겪은 며느리가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배웠고 언젠가 나도 그 자리에서 그런 힘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세월을 견뎠는데... 세상이 바뀌었다. 충성을 바쳤으나, 충성은 받지 못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이제 그런 단어조차 갑질하는 꼰대의 징표로 통할 뿐이다.


 우리 딸들도 자신들이 불리하면 나한테 ‘꼰대’냐고 놀린다. 그 말을 내가 싫어하는 걸 알기에 웬만하면 넘어가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 일들이 늘어나다 보니 은근 열도 받고, 왜 꼰대면 좀 어때? 하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꼰대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이유는 왠지 그 말속에는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거 같고, 내가 갖고 싶은 덕목의 하나인 ‘유연함’에 반하는 인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어떤 표현보다 내게 더 욕처럼 들리는 건 이제 내가 진짜 ‘꼰대’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세대를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 시대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린 세대 간의 위화감과 불신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그러나 ‘ 자세히 봐야 예쁘다’고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알게 되면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세상이 변했고 세대도 바뀌었다. 예전에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지금은 악습이 되어 버렸고, 그 시절 화두가 지금은 구태해졌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한다. 옛날에 ‘총알 탄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가끔 난 지금 총알을 타고 날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국민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해도 한 반에 60명씩 되는 아이들이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들었고, 길을 가다가 오후 5시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춘 채 가슴에 손을 얹고 다 같이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다.) 학교에 엄마가 오시면 선생님께 "우리 애가 말을 안 들으면 때려 주세요." 하고 부탁하셨고 선생님은 그 말을 아주 잘 지키셨다. 기생충 검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변을 봉투에 담아 학교에 가져갔던 채변 검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육체 건강은 지켰으나 정신건강은 해치는 행위였던 거 같다. 지금처럼 화장실 시설이 잘 되어 있지도 않은 가정에서 신문지를 깔고 볼일을 봐야 하는 일은 어린 나이에 겪었음에도 인간의 품격에 모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마 지금의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시킨다면 엄마들이 더 난리를 피울 것이다.

 언젠가 엄마한테 어릴 때 학교에서 쥐 잡기 운동의 일환으로 쥐를 잡아서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시절에 당연하게 행해졌던 일들이 지금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런 일들이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이 아니며 몇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겪었던 일상이었던 것이다. 그때 당연한 일들이 지금은 하지 않거나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되었다. 아침마다 선배의 커피를 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상사에게 육두문자를 듣고 화장실에서 울고 있을 때 고참 선배는 ‘너의 월급에는 욕값이 들어있다’고 나를 위로(?)했다. 내가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늘어놓는 까닭은 살아온 경험이 다르다는 것은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 알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된다. 말을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적인 태도가 아닌 대화하고 공감하면 서로의 간극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부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난해 보지 않고 죽는 사람은 있어도, 늙음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태어나서 팔구십 년 정도 죽지 않고 산다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아무리 젊은 세대라 하여도 다음 세대에겐 기성세대가 된다. 중3 딸애의 눈에 중1의 아이들이 무개념 요즘 애들로 보였던 것처럼 윗세대의 입맛에 맞는 아랫세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북하면 고대 동굴에도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는 우스갯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끔 친구들이 직장의 후배들이나 아랫세대들에게 충고나 조언을 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농담반 진담반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무리하지 마. 우리가 세월하고 맞바꾼 노하우를 그리 쉽게 알려주면 우린 뭐 먹고사냐. 쟤네들은 젊은데 인생의 혜안까지 생겨버리면 우리랑 경쟁이 되냐. 조언하지 말고 그냥 대화해. 시시껄렁한 농담하라구.”


 인생은 불공평한 듯하면서도 공평하다. 세월 안에서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인생의 시크릿이 삶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가 아랫세대에게 우리의 가치관이나 기존의 틀을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아랫세대 또한 자신들의 틀을 기준 삼아 기성세대들에게 ‘꼰대’ 또는 ‘라떼 언니', ‘늙으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야 된다’(우리도 사람 봐가며 지갑 열고 싶거든)같은 말로 비하하는 것 또한 폭력일 수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뭐 그들이 예순 살쯤 되었을 때에도 아랫세대에게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한다면 깨끗이 승복하겠지만(그럴 일은 절대 없다에 손모가지 걸겠음ㅋ)

 난 가끔 다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곤 한다. 그러나 대답은 NO. 지금의 경험치를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모를까 그냥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똑같이 방황하고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이 길을 다시 한번 걷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시대 수많은 꼰대(?)들이여 비록 우리의 뜨거운 태양의 시간은 사그라들었지만 지는 노을빛이 더 아름답고 해 저물녘 그림자가 더 길게 드리울지니, 우리의 지난했던 시간들을 보내며 깨달은 삶의 지혜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길... 세월은 기억력을 가져간 자리엔 통찰력을 두고 갔으니 우리의 내일이 오늘보다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나이 들수록 가슴에 와 꽂혔던 영화 '은교'의 대사로 글을 마무릴 하려 한다.     


 “너의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영화 <은교> 中






(네 번째 에세이 끝)


- 웹진 <숨 빗소리>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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