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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랑한 마들렌 Sep 20. 2023

꼰대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걸 모른다

(쓸데없이 긴 글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KTX나 SRT를 타본 것은 작년, 올해가 처음이었지 싶습니다. 타 지역에 나다닐 일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갈 일이 있더라도 자가용 차를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고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비싼 교통수단을 이용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홀로 지방에 가던 길, 예약해 둔 열차의 지정 좌석에 도달해 보니 한 할머니가 이미 앉아 계셨습니다. 거듭 예약 사항을 확인했지만 내 자리가 분명했습니다. 그제야 보니,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고 두 분은 부부로 보였습니다.

'아, 부부가 함께 여행하시는데 바로 붙은 자리에 앉으시면 불편하니 편안하게 각자 두 자리씩 차지하려 하셨군.'

센스 있게 머리가 돌아갑니다. 혹 예약한 자가 없어 비어 가는 좌석이기를 기대하며 앉으셨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 자리를 양보한들 나야말로 예약하지도 않은 자리에 앉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르신, 이 자리가 어르신 자리가 맞나요? 제가 예약한 자리인 것 같아서요.”

공손히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어르신, 저에게 사정을 설명하려 드십니다.

“어? 그게, 우리가 같이 가는데 짐이……”

“네?”

건너편에 앉으신 남편께서 얼른 이리 오라고 면박을 주시고, 할머니는 천천히 일어나 자리를 옮기십니다.


자리에 앉으며 생각합니다.

‘상황은 대충 알겠는데 그걸 남에게 양해해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거지?'


그래요, 제가 어릴 적에는 무궁화호, 새마을호, 심지어 통일호 열차를, 입석으로 표 끊고 빈자리에 앉아 가다가 주인 나타나면 일어서고 그런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기도 했고, 좌우지간 주인이 나타나면 일어서는 것이 고금의 관례지요. 좌석 주인을 보고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한다는 것은 살 붙여서 말하면, 네 사정은 알 바냐, 내 사정이 이러하니 네가 양해하라는 식 아닌가요. 제 아이들에게도 늘 가르치듯, 젊으나 늙으나 남의 물건에는 손대지 말고 남의 자리에는 앉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윗세대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다며 반박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경험한 보다 강력한 사례를 하나 더 떠올려 보겠습니다.





중고물품 매매 플랫폼에 사소한 물건을 업로드해 두었는데 구매 희망자가 채팅을 걸어왔습니다. 동네 거래 조건이기에 만나서 직접 주고받는 걸로 되어 있었고, 대강 시간 약속을 했습니다. 사이버 공간상 초면에 약간 좀 예의 없는 태도가 느껴졌지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사람을 만나 본 경험상, 사람을 대하는 혹은 채팅을 하는 형식이나 습관의 문제이지 인간 본질의 문제는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상세 주소를 찍어 보내라고 여러 번 채팅을 보내셨습니다. 판매 물건 상세 화면에 거래 희망 장소가 지도와 함께 명확히 표시되어 있고 그간 거래했던 분들은 모두 그걸 보고 잘 찾아오셨는데 말입니다. 무슨 편의점 무슨 지점이라고, 내비게이션 검색하시면 나온다고(심지어 검색되는 것을 확인까지 한 후에) 이야기했는데도 자기 거에는 안 나온답니다. 무슨 아파트 후문으로 오시면 된다, 하고서 그 편의점의 상세 주소를 굳이 따로 검색해 보내드렸습니다. 내친김에, 판매 물건 상세 화면에 있는 위치 정보와 지도를 캡처한 사진도 전송했습니다.

알았다고 하시기에 도착 예정 시각을 알려 달라 했더니,

‘6시 15분쯤’.

이건 반말이죠.


아무래도 이 분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직접 만나 거래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 봅니다. 잠깐 스치듯 만나는 것이지만 낯선 이와 대면한다는 것은, 요즘같이 흉흉한 시대에 약간의 위험요소가 없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되어 물건을 들고 현관을 나서며 남편에게, 거래하자는 분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니 10분 안에 내가 올라오지 않으면 전화를 하라고 말해두었습니다.


저는 약속 장소에 미리 가 있었고 도착 예정 시각이 지났는데도 구매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채팅이 오는데, 도착했답니다.

차로 오셨느냐, 그 편의점이 맞느냐 물으니 그렇다고 합니다. 나는 왔는데 너는 어디 있느냐는 식입니다.

“제가 지금 그 앞에 있는데요.” 했더니,

“나도 거기 있어요.“ 

헉?!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고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아, 이거 예감이 맞았나? 그냥 빨리 집으로 튀어야 하는 건가?’

생각하며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채팅이 옵니다.

“아, 정문이네요.”

이런….

후문으로 오겠다고, 걸어가고 있다고 채팅이 옵니다. 약속 시간도 늦었지만 여전히 일관되게 예의 없게 느껴지는 채팅 말투에 기분이 상한 채로 기다립니다.



결국 만났고 물건을 건넸으며 현금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그분은 ‘후문으로 찍었는데 정문으로 안내를 했다’며-내비게이션을 흉보는 거겠지요- 힘들게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헐떡거리십니다. 머리는 흑갈색이었지만 연세는 좀 있어 보이셨습니다.(요즘 어르신들은 누구나 다 검은색, 흑갈색으로 염색을 하시니…)

그런 그분에게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름 기가 막히고 화가 나지만 “네, 알겠습니다.” 하고 현금을 받아 돌아서는데, 그분도 가려다가 다시 몸을 돌려 내 뒤통수에 대고 불평을 합니다.



“아니, 내가 나이가 70이 넘어서 잘 몰라가지고 그런 건데, 물건을 주고받는데 웃으며 거래해야지, 어쩜 그렇게 웃음기 하나 없이 사람을 대할 수가 있어요?!”

엥?

한 성격 하는 저이지만 세상 살다 보니 성질 많이 죽어서 꾹 참고 돌아선 건데, 이렇게 하시면 트리거죠.

다시 그분을 똑바로 대면하고 말합니다.

“선생님이 나이 많은 게 제 탓입니까? 잘 모르셔서 이렇게 됐으면 사과를 하셔야죠. 사과 한마디 없이 물건만 받으신 분이 누구신데요?”


그래도 할 말이 없지 않은 그분입니다.

“내가 실수했어요! 내비에다가 후문으로 찍었는데 정문으로 안내를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여까지 뛰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인상을 쓰고 그래요, 기분 나쁘게!“

“네, 뛰어오시느라 힘드셨겠네요. 하지만 그건 선생님 사정이죠. 제가 잘못해서 뛰어오신 거 아니잖아요. 저는 여기 서서 한참을 기다렸거든요. 제가 인상 써서 기분 나쁘세요? 저는 아까부터 기분 나빴어요. 채팅에서도 예의 바른 분은 아니시던데요? 실수를 하셨으면 사과를 하셔야죠. 본인 실수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으시면서 제가 웃음기 없이 대한 게 기분 나쁘다는 겁니까?“


그래요, 다퉜습니다.

길바닥에서.

노인하고요.

결국 거래는 무산되었고 물건과 현금을 다시 맞교환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과연 누가 꼰대인가


두 가지 꼰대 사례라며 손가락 노동을 꽤나 했네요.


저는 그분에게 쏟아낸 저의 말들이 옳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다툰 것은 자랑스럽지 않지만 저는 이겼다고 생각했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


어찌 속이 시원할 수 있을까요. 특히나 마음공부를 하면서는 더더욱 부정적인 사고와 언행을 멀리하려 노력 중인데 이런 일을 벌였으니 스스로 마음에 거리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참 불편합니다.


한참 뒤에 그분에게서 채팅이 옵니다.

사과를 하십니다. '운전하면서 문자를 다시 보니 정문으로 착각을 해서 그랬다(아까는 내비 탓이라더니.. 쿨럭), 먼저 사과를 해야 되는데 뛰어오다 보니 여유가 없어서 그랬다' 하시며, 화낸 것 용서해 달라 하십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합니다.

다툰 후 먼저 손 내미신 이분의 행동으로 이 일이 맺히지 않고 흘려보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안도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먼저 사과하시는 걸 보니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

한 번만 더 참으면 될 것을 굳이 입바른 소리 하여 남의 마음 아프게 한 것에 죄책감.

그 와중에도 내가 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생각에 묘한 쾌감까지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늙으면 꼰대가 된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그 이유는 극도로 자기중심적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건강이 나빠져 내 몸이 힘드니 타인을 배려할 여유가 없고, 인생 살아 보니 별거 없어 부끄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 변해가는 것도 받아들이기 싫고 내가 변하는 건 더욱 싫으며, 연장자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이 여전히 뿌리 박혀, 나는 늙었으니 젊은 네가 양보해야 한다는 식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저 역시 꼰대였습니다. 상대방이 누구이건 내가 양보하고 한 발짝 물러서 줄 수도 있을 텐데, 명색이 '좀 배운 사람'이고 마음공부까지 한다는 사람이 그깟 일로 길바닥에서 엄마뻘 되는 분과 다툴 일이냐고요.

생각해 보면 타인으로 인한 사소한 불편들은 곧잘 그냥 넘기곤 하는데 이번에는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왔다고 인지한 것입니다.

물론 내가 옳았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걸 그토록 강하게 주장하는 행위는 필수가 아니었지요.

나는 젊은 꼰대.

이제는 한 단계 올라서, 먼저 싸움을 걸어온다 해도 지나가도록 둘 수 있는 여유와 사랑을 내 안에 다져야겠습니다.



답장을 보냈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과하게 대응한 점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그분을 위해 마음속 깊이 기도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잊고 교훈만 남기시길, 그분이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즐겁고 행복한 일들 많이 생기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죠. ‘늙으면 인자하고 관대한 사람의 얼굴을 갖고 싶다‘고 늘 생각해 온 저인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멉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내디뎠으니 갈 길이 한 걸음은 줄었다 생각하며 나를 응원해 봅니다.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걸 모릅니다. 그래서 꼰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신이 꼰대인 걸 아니, 꼰대가 아닌 걸까요. 아니면 더욱 구제불능의 꼰대일까요. 

꼰대가 꼰대더러 꼰대라고 하는 것은 무슨 꼰대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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