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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Feb 01. 2023

두려움 극복은 조앤 디디온처럼!

   당신은 극복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하나요? 여기 지적인 논리와 섬세한 감성으로 치명적인 문장력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여인이 있다. 바로 신선한 목소리와 통찰력,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미국에서 명성을 떨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조앤 디디온이다. 그녀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읽고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이다. 40년 동안 거의 매일 한 공간에서 붙어 지내던 인생의 동반자이자 글쓰기 도반인 남편이 갑작스럽게 ‘급성 중증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비통함’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애도’나 ‘상실감’은 무슨 뜻인지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갔을 때 느끼는 ‘무엇’은 어떤 느낌일까. 상실 다음에 끝없이 계속되는 부재나 공허감, 순간들의 무의미함은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이 용감한 여인은 직접 겪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누구도 남편을 잃는 게 어떤 건지 가르쳐주지 않은 그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와 무의미한 순간들과 그 사이사이에 느끼는 감정을 낱낱이 파헤친다. 자신의 생살을 뚫고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소용돌이와 혼돈 속에서 두려움의 실체를 산 채로 잡아온다. 이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두려움과 대질 신문을 하여 이 괴물을 서서히 정복해 나간다. 그 방법은 바로 ‘글쓰기, 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읽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소설 쓰기’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직접 뭔가를 조사해보고 나면 덜 무서웠어요. 뱀을 눈높이에 두면 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고통에 맞서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보통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나 두려움을 만나면 타조처럼 땅속에 얼굴을 박고 외면해 버린다. 현실 도피로 당분간은 아무 일 없는 듯 무감각하게 지내고 싶은 거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고야 만다’는 명제처럼 시간이 지나면 수면 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방치된 두려움은 곪고 썩어서 결국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내면 전체를 오염시킨다. 그 냄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치유하기 힘들 정도의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린 시절 당한 정서적 폭력에 대한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성인이 된 경우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고통이 미해결 된 고통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가다 보면 결국에 마음의 병이 깊어져 몸에 이상이 오고 마는 것이다.

      

  나 또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오랫동안 방치한 채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인정을 받고자 애쓰며 살았던 적이 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쿠크다스처럼 부서지기 쉽고 예민하게 변해 타인이 별 의미 없이 한 말에도 크게 상처를 받았다. 한 번은 직장에서 "오늘 집에서 입던 츄리닝 같은 것을 입고 왔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패션을 무시하나’라는 모욕감이 느껴졌다. 그냥 "요즘 유행하는 조거팬츠라는 거예요. 다려 입지 않아서 더 그래 보이나 봐요."라며 쿨하게 말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포커페이스도 안 되고 그냥 얼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본인 옷이나 신경 쓰실 것이지.’라며 반항심마저 올라왔다. 또 좀 센캐의 선배가 나를 칭찬하는 관리자의 말에 "열심히 하면 뭐해요? 잘해야지."라는 말에도 상당한 수치심을 느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못하나? 내 어떤 점 때문에 저 사람은 나를 그렇게 싫어할까’라고 생각하며 자기 비하로까지 빠졌다.     


 

 『마음아, 넌 누구니?』에서 박상미 교수님은 상대를 비난하는 심리를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비난이라는 형태로 조언을 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자신이 한 말에 내가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심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그것은 우월감일 수도 혹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공격성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건강하지 않은 심리를 가진 사람의 말 때문에 고통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받는 마음의 상처를 남 탓으로만 돌리고 있기에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내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고 싶었다.

     

  쉽게 상처받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에 지나친 통제와 억압과 함께 정서적으로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해 형성된 고통이 깔려있었다. 의사이자 작가인 베르너 바르텐스는 『감정폭력』에서 유소년기에 정서적 폭력과 같은 상황에 노출된 사람은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며 상대는 물론 자신마저 힘들게 한다고 한다. 또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애정을 쏟아붓기도 한다고 했다. 딱 내가 그랬다. 고통과 마주할 용기도 고통의 원인을 파악할 통찰력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든 감정폭력 가해자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부모는 AI가 아니라 뜨거운 사람이지 않는가. 그들이 소화하기 너무 어려워 던진 뜨거운 감자를 식혀서 먹어치우고 소화시키는 것은 이제 뭘 좀 아는 나의 몫이다. 그리고 그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람도 부모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아는 나 자신인 것이다.    

 

  조앤 디디온은 또 다른 인터뷰에서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 내게 있어서 그렇게 끝까지 파헤치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다.”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나 또한 ‘도대체 내 삶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파헤쳐왔다. 나에게 있어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다. 그렇지만 어설퍼도 파헤치기의 끝은 글쓰기임을 이제는 안다. 오랫동안 쌓고 쌓은 지식과 거기에서 파생된 사유가 예리한 갈고리가 되어 두려움의 실체를 몸속 깊은 곳에서 끌어낼 게 분명하니까. 새벽 2시 15분. 여전히 무시무시한 글쓰기라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파헤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지금 나는 글쓰기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임을 어렴풋이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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