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A와 매우 대조적이다. A와 B를 보면서 행복은 정말 성적순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B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다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전공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oo 예고, xx 대학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동네에서 교습소를 열어 몇 년간 운영하다가 20대 후반이 되어서 유학을 갈 결심을 했고 나한테 레슨을 오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B는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피아노 실력도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참 착하고 성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사실 명문 학교를 나오고 잘한다는 사람은 꿈도 크기 마련이어서 유학을 갔다 오면 어디 그럴듯한데 자리 잡기를 바라는 계산이 마음 한 켠에는 있게 마련이다. 고학력자들은 학생을 가르칠 때도 전공자만 가르치려 하니 오히려 레슨을 많이 못하고, 연주나 콩쿨 등등 이것저것 통 크게 활동비를 쓰다 보니 부모님께 의지하는 경우도 많은데 B는 대학 졸업 직후부터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꾸준하게 일을 해왔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 유학도 본인 스스로 커리어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행 삼아 + 경험 삼아 넓은 세계를 구경하는 의미로 가보고 싶어서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학사 끝나고 바로 유학 가서 석사, 박사하고 또 얼른 한국에 돌아와서 자리 잡는 것이 엘리트 코스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게 살며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사다리 꼭대기만 쳐다보며 '나는 저기까지 언제 올라가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B는 본인의 인생을 훨씬 여유롭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허황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을 더 감사하며 살 수 있다. 꼬맹이들 가르치는 것도 적성에 맞아 좋기는 한데, 그래도 이렇게 유학을 준비하면서 다시 피아노 연습을 하게 되니 너무 기쁘다고 했다. 학생들이 교습소에 오기 전 오전 시간에 혼자 연습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다고 ^^
B는 나랑 공부한 1년여의 기간 동안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 절대적인 실력만을 놓고 본다면 B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많지만, B의 발전 속도를 본다면 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다른 욕심 없이 본인만을 위한 연습 시간을 갖는 것 자체에 행복해하니 실력이 느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외국 학교 오디션은 준비해야 될 레퍼토리가 아주 많아서 처음엔 B가 이 많은 곡들을 다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웬걸,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고 지원했던 학교 5군데 중에서 4군데에 합격을 해서 지금은 장학생으로 보스턴 음대에 다니고 있다.
미국에서는 단순 시험 성적으로 학생을 뽑지 않고 추천서를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 학교마다 거의 비슷하게 물어보는 항목들이 몇 개 있고 그다음에 자율로 학생에 대해 서술하도록 되어 있다. 학생의 지금 당장의 실력이나 성적보다 태도(attitude), 발전 정도(progress), 소통 능력에 대해서는 반드시 물어보고, 학생의 정서적 상태에 대해서 평가해 달라는 학교도 있다. 내가 B의 추천서를 쓰면서 이런 항목에서 자신 있게 최고점을 주고 편지도 시간을 들여 진심으로 좋은 얘기를 쓰게 되었다.
B는 유학을 가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동경, 겸손함, 착하고 예의 바른 마음씨는 동네 꼬마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부족함 없지만, 넓은 세상을 보고 돌아오면 더 좋은 선생님이 되지 않을까? 자기의 페이스(pace)로, 독립적으로 인생을 사는 B가 참 좋아 보인다. 그 누구보다 여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