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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경 Mar 01. 2024

음악 전공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나에게는 이제 막 본격적인 전공의 길로 들어서는 학생이 두 명 있다. '본격적인 전공'이라 함은 음악 학교에 입학하여 자신의 우선순위가 음악이 된다는 뜻이다. 한 명은 예고에 입학하고, 다른 한 명은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한다. 두 학생 모두 이전에는 공부를 하면서 악기를 병행했었는데 이제 full time music major student가 되는 것이다.


둘이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이거 내가 잘 선택한 게 맞는 걸까?

둘 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고 본인의 의지로 전공을 결심한 케이스다. 예고에 들어가는 학생은 일반 중학교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고, 대학원 진학하는 학생은 이미 좋은 회사에서 job offer를 여러 개 받았는데 첼로가 너무 좋아서 2년만 더 해보겠다고 이번에 오디션을 봤다. 그런데 막상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보니 '정말 이래도 될까?'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일을 해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음악을 좋아서 선택할 경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큰 것 같다.




예고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온 후 마음이 무거워졌다는 제자 이야기를 듣고 내가 예고에 입학하던 때를 돌이켜봤다. 공부를 했어도 외고 정도는 붙을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피아노가 좋아서 예고에 지원했고,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처음엔 뛸 듯이 기뻤다. 일반중에서 서울예고에 붙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아닌척할래도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는데 나도 (너무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교복을 맞추고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와서는 학교에 대한 기대보다는 예원에서 다 같이 올라와서 떠들썩하게 지내는 아이들 속에서 약간의 기죽음과 함께 '그냥 공부를 할 걸 그랬나?'라는 후회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원 들어가는 학생한테도 너무너무 공감이 된다. 얘의 대학 동기들은 이미 직장 일을 시작했는데 자기는 오디션 준비를 했고, 사실 준비하는 동안은 너무 행복했는데 막상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내가 결국 음악을 안 하게 된다면 지금 2년은 그냥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음악을 업으로 하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그렇게 top 급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만두기에는 음악을 너무 좋아하고... 그래서 울며불며 고민하다가 음악을 일단은 더 해보자고 결심을 한 건데 막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시간 낭비가 될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아이의 고민이 너무 이해된다. 본인의 인생에 애정이 있고 책임감 있게 살고 싶기 때문에 드는 고민이다.


나는 이렇게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 그만둬도 괜찮아.

할 만큼만 대충 하다가 손 털고 나오라는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아직 하고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다. 음악을 전공한다고 해서 평생 이것만 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아직 '전공생'의 신분일 때는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음악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이 순간에는 음악에만 집중해서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학생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이다. 지금 당장에 잘하고 못하는 것과 상관없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느냐는 정말로 중요하다. 그렇게 한 가지 일에 최선을 다해본 사람은 다른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줄 알고, 자기 분야에 몰입해서 발전이라는 과정을 겪어보면 다른 일에도 인내심을 갖고 노력할 수 있다. 음악은 언제든지 그만둬도 좋지만 음악을 하는 동안 과정에서 배우는 삶의 가치는 절대 헛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입시라는 과정을 지옥 같은 스트레스로 여기는 것 같지만 사실 나와 학생들에게는 가장 단순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최선을 다한 후 그다음의 결과는 운에 맡기는 거다. 입시의 결과를 기다리면서 무조건 합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학생의 운명이 음악을 계속할 운명일까?'가 궁금했다. 음악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계속할 수 없도록 길이 막혀버린다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생을 위한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었지 합격을 위한 합격을 바래본 적은 없다.


내가 아주 오래 살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40 몇 년 살아보니 될 일은 돌고 돌아서라도 결국 되고, 안 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실력순으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보기에 성공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은 실패라고 생각했던 경험이 나중에 돌아보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나는 '사람의 팔자'라는 것을 믿게 됐다. 본인의 선택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것이라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겠지만 그게 정말 너희들의 선택만이었을까? 너희의 인생에 전공을 할 운이 들어있어서 이 방향으로 오게 된 거라고 생각하면 어때.


지금 내게 주어진 역할, 처한 상황은 운명이 나에게 주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피할 방법이 없고 어쨌든 해야 하는 것. 음악을 전공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도 어찌 보면 숙제이다. 그러나 이 숙제가 끝나고도 또 같은 종류의 숙제가 주어질지 완전 생뚱맞은 다른 종류의 숙제가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멀리 내다보지 않고 지금 주어진 숙제 하나씩을 즐겁게 클리어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당분간은 음악을 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계속하고는 있지만 '나는 언제까지 음악을 하고 있으려나?' 문득문득 궁금하다. 이에 엄마가 명쾌한 답을 주셨다. "그만둘 때 되면 알아서 길이 다 막혀있겠지. 지금 생각할 필요나 있냐." ㅋㅋㅋ 정답.

딱 요런 기분 ㅋㅋ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마니또 게임의 행운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짝꿍이 되었다면? 다음번 뽑기를 할 때 짝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슬퍼하며 주어진 시간을 허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짝이 된 것에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 잘해주고 싶지 않을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과정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그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자기 자신을 가꿔나가는 것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학생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학생의 신분이 좋은 것은 시간을 사치스럽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발전, 음악에의 몰입 등 순수한 가치에 100%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호화로운 시간인가! 그래서 학생들이 어른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예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가꿀 수 있으니까. 나이를 먹어서 더 이상 학생일 수 없게 되는 때가 오면 이렇게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잘 없다.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한다. 어른이 되면 그 시간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단다.


내 얘기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고민을 탁탁 털어버리고 기분이 짱 좋아지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공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평생의 직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1, 하나의 가능성을 더 가지는 것뿐. 이제 1인 1직업인 시대는 끝났다. 시대가 그렇게 변하기도 한데다가 너희들은 앞으로 120세까지 산대... 그 긴긴 세월 뭐 하면서 다 채울 거니;;; 음악도 하고 다른 일도 하고 다양한 거 해보면서 살으렴. N잡러가 당연해지는 세상에서 다른 직종은 늦게 시작해도 도전 가능하지만 음악은 지금 하지 않으면 어려운 분야인데 그걸 해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여러분의 풍요로운 인생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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