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함'과 '윤리함'을 중심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사전적 의미는 동물의 일원이지만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고도의 지능을 소유하고 독특한 삶을 영위하는 고등동물 이다. 앞 문장의 중심 키워드는 ‘고도의 지능’과 ‘독특한 삶’일 것이다. 고도의 지능은 IQ의 영역이라 치고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독특한 삶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논의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요소들을 탐구해보면서 탐구해보려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철학함’과 ‘윤리’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모두 철학하는 존재이다. 그 어떤 인간도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사회구성원 그리고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나’, ‘사회’ 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인간이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 비판적 사고의 빛을 잃어 갈 때도 있겠지만 인간은 일상 속에서 ‘철학함’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일상 속에서 ‘철학함’을 실천해야 하는 까닭 무엇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철학자로 태어나 철학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종 철학은 인생과는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학문이라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은 철학 하지 않고 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이다. 철학이란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 사유하는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비추어 삶을 성찰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철학은 자연적이고 사실적인 것들에 자신을 맞추기 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해내는 사유활동에서 시작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의식은 주어진 사실과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경험적 사실에 우리를 일치시키면 오히려 그것에 사로잡혀 압도되기 마련이다. 자연법칙에 순응해 살아간다면 자유를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주어진 법칙을 거부하고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개척자이다. 헤겔은 그의 저서 『법철학』의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아오른다" 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부엉이는 철학의 비유이다. 비로소 황혼녘이 되어서야 부엉이가 날아오른다고 하는 것은 낮과 밤의 대비에서부터 기인한다. 대낮의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세상이다. 인간은 감각에 의존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남과 다툰다. 같은 물체를 같은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측면과 떨어진 그 내재적 운행방식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마련이다. 이때문에 지속적인 싸움의 굴레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들은 실재를 보지 못하고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보고 이를 이를 명증 하다고 믿는다. 이는 낮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각자가 본 것 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데아를 기억해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즉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을 알아야 한다. 밤이 되면 어둠이 찾아오고 이로 인해 대낮에 보았던 분명한 것들이 애매모호한 무엇인가 가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이를 통해서 내가 명증 하다고 생각 했던 것 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의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밤'의 잠재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철학의 실천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실천은 쉽지만은 않다. 그 예시로 철학은 언어와 논리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언어라는 사유의 매개체는 그 의미를 온전히 전하는 것을 방해하기 떄문이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처럼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제한적이다. 하지만 언어나 텍스트의 불분명함은 상호간 지속적인 토론과 대화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결국 깨달음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 철학은 이런 활동을 돕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는 울리히 벡 이 주장한 바와 같이 '위험 사회' 이다. 이러한 위험사회가 도래된 까닭 중에 하나는 과학에 지나친 의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철학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은 이에서 비롯되는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과학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삶이 두려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밤을 보려 하지 않고 대낮의 저명함을 믿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나는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하며 역설적인 태도를 취해 지속적으로 과학을 재생산한다. 악순환인 것이다. 물론 사회에서 과학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 하고 있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보다 본질적이고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미결성을 띈다. 실제로 현대 과학자들은 과학과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 예시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다. 또한 과학은 우리에게 이 세계에서 얻어진 데이터인 실증적 자료를 요구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철학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은 앎과 지식과는 결이 다르다. 이는 '사유'의 영역이다. 사유란 무비판적으로 지식을 받아들이고 이를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닌 실천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지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학보다는 스스로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철학이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철학함’을 실천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동물이다. ‘윤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이다. 윤리라는 단어는 윤리를 가르치는 교수나 선생님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일반인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윤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가 언제인가 생각을 해보니, 윤리라는 덕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었다. 예를 들면 파렴치한 범죄자의 소식을 접하거나 마더 테레사급의 인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 참 비윤리적이다.’고나 ‘윤리적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타인의 행위를 보고 윤리의 잣대를 종종 들이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거나, 아기가 아무 데나 오줌을 싸는 행위를 보고 윤리적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일단, 전자의 경우는 인간과 짐승을 구분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즉,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자아 성찰, 즉 반성의 능력이 있고 짐승들보다는 본능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지기에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아직 사회적 교육이 덜된 아기이기 때문에 윤리적 판단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서론에 언급했듯이 인간은 그 누구도 진공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최소한 두 명의 타인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많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만약 평생을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동굴에서 사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윤리를 알 필요도, 그에 따라 행동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로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윤리라는 것은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대두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인간이라는 말이 있듯 말이다. 또한 아기의 보호자는 아기를 사회 속에서 온전히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것들까지 교육을 한다. 이 과정에서 윤리의 교육적 특성이 대두된다. 보호자가 가르치는 윤리에는 크게 두 가지 특성이 있는데 공동체적, 개인적 특성이 그것이다. 아기를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보호자는 그 사회의, 즉 그 공동체의 윤리를 가르치고 제대로 된 가치관과 사고력이 형성되지 않은 아기는 이를 대부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시기에 대한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과연 보호자가 가르치는 것들 것 아이들에게 온전하게 전달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한편, 아기가 어느 정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윤리적 사고가 가능해지는 시점이 온다면 교육받은 윤리관을 온전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수정, 재고를 통해 본인만의 윤리관을 성립해 나갈 것이다. 이는 온갖 외/내부적 요인뿐 아니라 무의식까지 뒤섞인 복잡한 과정이다. 하지만 본인이 자신의 복잡한 사고의 심화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본인의 윤리관만이 옳다는 식의 독단적 행위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진공속에서 살지 않는 사회적 동물인 만큼 공동체 구성원 간의 충분한 합의와 논의를 통해 올바른 윤리관을 성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칸트가 철학은 절대 알 수 없지만, 철학 함은 알 수 있다고 말했듯이 윤리 역시 그러하다. 앞선 칸트의 말을 패러디해서 인용하자면 윤리 자체는 절대 알 수 없지만, 윤리 함은 알 수 있다. 보호자 역시 어린이들에게 윤리 함을 가르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철학과 윤리의 소명은 무엇 인가? 소명의 사전적의미는 부름이다. 부름은 주체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이는 이 시대의 어두운 '밤'으로 비유된다. 대낮의 태양 아래에서 명증 했던 것들이 모호해지는 밤에서 부터 명증 했던 것에서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철학을 행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밤'을 깨뜨려야 한다. 철학자로서 사람들의 잠재적인 역량을 일깨워 그 스스로 미래의 정신을 함양하도록 실천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처럼 본인의 무지를 인지해야 하는 까닭은 무지에 대한 무의식이 다가올 공포에 대한 암묵적 동의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철학자의 역할은 소크라테스처럼 ‘잔소리꾼’ 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명증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들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회의를 하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철학함’과 ‘윤리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철학과 윤리적 현실의 문제를 깨닫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