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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다 Jul 23. 2020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위로 받는 방법.

콘택트(1997)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것이 불합리하냐고 묻는다면 내 경우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오후 한 시까지 늘어지게 자다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털레털레 카페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에 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말인즉슨, 단지 지금 불합리하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는 것일 뿐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러한 누군가를 비합리적이다라고 할 생각은 없다. 만일 내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노역에 참가해야 한다거나, 강제로 매주 일요일 자전차왕 엄복동을 봐야 한다거나 하면 나는 교회를 나갈 것이다. 교회 출석과 믿음을 동치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나는 정말로 신을 믿을 거다. 그땐 그 편이 합리적이니까.


 심지어 나는 이미 세례 받은 천주교 신자이자 수계 받은 불교 신자이다. 세례명은 제네시오이지만 법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자보다 영어에 익숙한 세대라서. 살면서 세례명이나 법명 하나 정도는 있어줘야 정 뽐낼 거 없을 때 이거라도 뽐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자격증 따듯 12주 속성으로 각각 취득했다. 개신교는 나에게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유용하게 쓰고 있냐고? 웃음이 많은 처음 본 여성에게 가끔 써먹는다. 안타깝게도 효과는 미비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신과 함께 영원불멸하리라는 그 약속으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한다. 콘택트의 엘리가 그러하듯이. 죽음 뒤에 불멸하는 정신과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천상의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다. 혹시 가끔 일상이 따분하고 무료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이 초래할 저주를 깨달을 수 있다. 긴 삶은 필연적으로 우울증을 만든다. 심지어 그게 과수원에서 사과 서리하는 정도의 일말의 일탈조차 허락되지 않는 에덴동산에서의 삶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아마도 천국의 우울 병동은 문전성시일 거다.


 나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과학적인 사고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영원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일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 위로를 준다. 이과를 나오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소들의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사람의 몸은 알려진 118개의 원소 중 수소(H), 산소(O), 탄소(C), 질소(N), 네 가지 원소를 주로 사용해서 만들어졌다. 이 중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원소는 오로지 핵융합을 일으키는 젊은 별의 중심부에서만 만들어진다. 다른 경우는 없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몸은 부패하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흩어져 우주 여기저기를 떠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다시 모이면 새로운 별이 된다. 그래서 내가 잘났든 못났든, 남보다 돈을 잘 벌든 못 벌든,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와서 만났고, 헤어지면 다시 별로 돌아간다.


 내가 필멸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오늘 만난 너를 언젠가는 잃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 나는, 우리가 모두 같은 곳에서 와서 같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통해, 그러한 유한성이 주는 상실감과 고독을 잘 이겨낼 수 있다. 콘택트의 시나리오를 쓴 과학자 칼 세이건은 이 영화가 개봉하기 1년 전, 앨리의 아버지처럼 아직 14살의 어린 딸을 남기고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불가지론자였던 그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칼 세이건의 저서 코스모스는 한국의 인터넷 서점에서 과학분야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한편 한국의 어떤 글쓰기 클럽의 첫 번째 글쓰기 주제는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콘택트였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잃은 사샤 세이건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이렇게 어떤 형태로 살아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입니다. 특히 나는 다음 세기의 학생들도 어쩌면 아버지의 글을 읽고 그의 삶을 생각할지 모른다는 것을 가끔 상상하며, 이는 죽음보다 더 강력한 무엇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 배웠던,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몇 십억 년 뒤 태양은 수명을 다할 것이며, 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 인간의 문명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멸과 필멸의 수수께끼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아버지와 나눴던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내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아버지를 느낍니다.


 신에게 맹세코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너를 만나기 위해 박테리아에서 진화해 여기에 왔다는 사실이 내겐 더욱 로맨틱하다. 삶의 뒤에 알 수 없는 고통과 환희, 그 양자택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여기 살아있고, 너와 별을 통해 연결(Contact)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겐 훨씬 놀랍다. 실제로 나는 지금, 필리핀의 시골 마을, 아무것도 없는 이곳 모알보알에서 3회의 다이빙을 마친 뒤, 이 글을 쓰고 있다. 비록 우리가 서로 볼 수 없음이 아쉬울지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누군가가 나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 나는 무척이나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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