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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uk Kim Sep 09. 2020

비교정치론 : 우리는 끝없이 '절반'이다

인권의 일상점유율에 대해서

우리는 끝없이 ‘절반’이다 : 인권의 일상점유율에 대해서

학부 2년, 비교정치론


21세기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얼마만큼 실현했는가?

Keyword : 정몽주와 제프 베조스, 임계장 이야기, 시몬 베유, 마이싸이더, 보석과모래




Ⅰ. 들어가면서

: ‘인권의 일상점유율’



1949, 엘리너 루스벨트


 6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선언은, 우리들의 삶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설계도와 다름없다. 인류는 이를 읽어보면서 각자의 권리를 형상화한다. 이 땅 위의 모든 이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들임에도, 모든 이들이 누리고 있지는 못한 문장들. 누군가에게는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만질 수 없는 사막 속의 신기루 같은 존재로써 다가온다.



 광활한 우주 속 먼지 한 톨 만큼도 되지 않는 우리들이 이따금의 선언을 내보이기 위해서 지나온 시간들은 길고도 쓰라렸다. 끝없이 부딪혀야했고, 저들의 총소리보다 더 큰 걸음소리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나의 다음 세대를 비추어 내는 빛 한 줌을 위해서, 나의 현재를 어둠으로 칠했다. 그렇게 잉태된 선언이었다.



 누군가는 예순 세 개의 문장이 가진 힘을 웃어넘겼으나, 누군가는 국가, 종교, 성별, 지위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불릴 수 있는 선언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공공연한 선언의 탄생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었고,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지 72주년이 된 오늘날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권을 지속가능한 가치로써 작용시키는 것이다. 환경을 보존하는 일뿐만 아니라 '인권을 보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빨대는 안 주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들은 왜 화장실에서 쉬어야 하나요' 「"청소부는 인권 없어"...초단기 계약의 비애」, 『YTN』, 2019.07.30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강력한 외침이나 구호 수준의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세계의 목소리가 담긴 선언을 '대한민국' 이라는 우리의 영역에서 작게나마 지속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식목일 날이면 한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처럼, 작은 인권의 씨앗들을 심어나가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훗날의 숲을 기약해보면서 말이다. 세계인권선언이 제정된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언의 채택이 그 자체로 인권보장의 '마침표의 종착지'가 아니라, 본격적이고도 당연한 인권보장을 일구어내기 위한 '쉼표의 기착지'로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21세기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얼마만큼 실현했는가' 라는 교수님의 질문을 달리 말하면, '선언이 이야기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우리들의 일상에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가' 라고 풀이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변화들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주 필연적인 과정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라는 플랫폼에서는 '세계인권선언' 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어떠한 방식으로 시민들의 삶 속에 적용시켜 나가는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권리들이 일상 속의 어느 접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지 단편적으로나마 확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인권의 밀도'들이 얼마나 높은가를 살펴보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자연스레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두고 '쟁취(Win or Gain)'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이룩 과정을 사업가로 비유하자면, 현대의 정몽구보다는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Jeff Bezos)에 가깝다.(상속과 자수성가) 패스트트랙아시아 박지웅 대표, 2020.05.28 그렇기 때문에 세계인권선언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더욱 극적이고 거대하다. 아마도 한국의 민주주의와 세계인권선언의 '관계특수성'이 존재한다고 추정된다.



 클래식한 경영학에서는 어떻게 하면 시장점유율(Market Share)을 높여 기업의 매출로 직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다. 제품 및 서비스가 소비자들의 일상을 어느 정도로 점유하고 있는가. 즉, 일상점유율(Life Share)이 매출로 직결된다.「이마트는 이제 라이프셰어(Life Share) 기업이다」, 『월간 디자인』, 2016. 01호 그러한 현재 트렌드의 경영개념을 접목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매일경제 MBA, 2011.01.14


 또한 30개의 선언조항을 수치화하여 한국과의 밀접수준을 살펴본다거나, 조문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비교를 진행하는 건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피부에 와닿기 어렵다. 따라서 최근 한국사회의 몇몇 사건과 일상 속 경험을 인권선언 및 인권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일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서술의 흐름으로 진행해보려 한다.




Ⅱ. 확인절차

    1. 관계특수성


 아주 간략하게나마 한국의 민주주의와 세계인권선언의 '관계특수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려 한다.



 글을 쓰고 있는 6월 10일, 실시간 검색어에는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이 올랐다. 이렇듯이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민주주의를 상속받은 것이 아닌, 몸소 이루어낸 것이었다. '인권'이라는 두 글자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쓰러졌음은 공상(空想)도, 망상(妄想)도 아닌 사실이다.



 그러한 역사를 가진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이 인권선언의 내용들을 조금이나마 특별하게 바라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선언의 메시지와 이한열이 쓰러지는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던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이 지금도 한국인을 마주치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손을 덥석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모습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시대를 거듭할수록 민주화 시대 당시만큼의 강력한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날 정도의 변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진화하고 발전하고 깨닫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은 실책하고, 장인(匠人)은 손을 다친다. 그러한 고통과 실수들을 항구적으로 제거하지 못하기에 John Gray, “A tribute to Isaiah Berlin”, ABC Radio, 2009.12.19 우리들의 국가에는 어떠한 과거의 현상이 다시금 재생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우리들은 세계인권선언의 가치와 한국의 민주주의의 교훈 아래에서, 그러한 고통들을 직시하는 동시에 이를 조정 문광훈, 「휴머니즘은 미신인가?」, 『열린연단 : 문화의 안과 밖』,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권력의 발원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87년도의 레퍼런스'와 '48년도의 가이드라인'의 연결선 속에서 한국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둘 사이의 '관계특수성'을 느낄 것이다.



2. 사례분석

: 나의 경험과 당신의 일상 사이에서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의 몇 가지 사건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우리들의 일상과 경험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와 최근의 사회적 이슈들을 인권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일상 - 인권 – 민주주의’의 밀접함의 정도를 살펴보려 한다.



● 사례 1 : 여름날의 포럼 




● 사례 2 : ‘마이싸이더’라는 단어의 탄생


 2020년 4월 14일, 제일기획에서는 '마이싸이더' 라는 단어를 언급했다.「우리 시대의 꿈」, 『제일매거진』, 제일기획, 2020.04.14 마이싸이더(My +Sider)는 삶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의 기준을 바탕으로 도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 트렌드라기 보다는 밀레니얼 세대부터 중년세대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자, 나 자신은 사회가 만들어 낸 '아싸 혹은 인싸' 라는 노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스스로가 삶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태도와 이를 반영한 '마이싸이더' 라는 언어의 탄생은 21세기의 시대상이었으며 우리들의 민주주의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선례였다. 한국의 '보통적' 인권상황이 이제는 먹고, 자고, 입는 문제의 해결에서 진일보하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선택하고 사유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 삶 속의 선택을 마음놓고 하기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숨죽이기도 했고, 소리치기도 했다.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버스에 올라탄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흑백인종분리법' 이라는 정체불명의 법률로 기소당했다. 그것이 촉매가 되어 흑인들은 38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버스를 타지 않는 시위를 이어나갔고, 흑인 교회에는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몽고메리의 사람들은 버밍햄과 워싱턴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의 마지막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은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 고 외쳤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는 "로자가 앉았기 때문에 마틴이 걸어갈 수 있었고, 마틴이 걸어갔기 때문에 오바마가 달릴 수 있었고, 오바마가 달리기에 우리 아이들은 하늘을 날 수 있다. (Rosa sat so Martin could walk; Martin walked so Obama could run; Obama is running so our children can fly.)" 「선거일에 되새겨보는 로자 파크스 스토리」, 『프레시안』, 2011.10.26  라는 슬로건이 미 전역을 뒤흔들 정도였다.


Washington Post, January 22, 2013


 그러한 '인권의 일반화'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희생되면서 제 자리로 돌아왔고, 시민들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마이싸이더'를 살펴본다면 단순히 생활트렌드를 표현하는 단어를 넘어서는 중량감을 느끼게 된다. 아주 또렷하게 몇 퍼센트의 인권이 한국의 민주주의 속에 녹아있는가를 밝혀내지를 못하더라도 쏟아지는 햇살이 어느 정도로 따스한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세상에는 행위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감이 되는 것들이 있다. 한국사회의 '마이싸이더'는 그러한 상징이다. 진정한 행복과 인권의 본질이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면 어느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서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인권을 지속가능하도록 보존'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절대적이다. 21세기의 작은 라이프스타일 개념 하나가 우리에게 던져내는 메시지는 이토록 강력하다.




● 사례 3 : 임계장 이야기


 경비원 최희석 씨는 주차관리를 위해서 차를 밀었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민에게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날아오는 구둣발은 그의 등 언저리 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멍을 입혔다. 그는 결국 "제 결백 발끼세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경비원들에게는 입주민 모두가 ‘사장님’」, 『시사IN』, 2020.06.03 여전히 인권선언이 무력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무용한 경우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실현, 인권의 '일상녹아듬'이 한계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같은 처지의 경비원들 중 한 명이었던 예순 셋의 조정진 씨는 자신의 노동일지를 ⌜임계장 이야기⌟ 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냈다.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을 줄여서 지칭하는 '그들'의 언어였다. 열악한 비정규직의 청년들은 '고르기도, 다루기도, 자르기도 쉬운 인력' 즉, 고다자라고 불린다. 책을 읽는 이들은 자신이 모르는 현실을 목격하고서 울컥했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분개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더욱 힘이 빠졌다. 조정진 씨는 아주 담담하게 자신이 홀대받고 무시 받던 날의 기억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임계장 이야기'의 저자, 조정진씨. 프레시안, 2020.04.05


 조정진 씨는 최희석 씨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 이라고 '자율부검'했다. 「경비원 죽음, ‘아파트 권력’ 눈치 안보는 정치였다면」, 『미디어오늘』, 2020.05.30



 인권은 경계를 논할 것 없이 존중되고 지켜져야 마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인권이 '차별적용' 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한 구분논리는 노동계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마치 '노동자와 일반인' 으로 분류되는 듯한 권리의 '게리멘더링(Gerrymandering)'이 나타난다. 우리들이 진짜 민주주의 사회, 진짜 인권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망설여진다.



 등대는 사방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제 기능을 한다. 등대가 가만히 서서 한 곳만을 비추고 있다는 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는 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러한 상태이다. 몇몇 바다만을 비춘다. 빛이 닿지 못하는 저편 바다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임계장 이야기'는 그저 '조정진' 이라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이며, 40년 후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제 2의, 제 3의 임계장들이 우리들 곁에서 주춤히 서있다. 똑바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건 그 무엇보다도 '인권' 이다. 이 두 글자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대우받아야 하는지의 전부를 내포한다. 세대의 탄생이 '임계장의 재생산'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 사례 4 : 창녕 아동학대 사건


 목숨이라는 것이 이토록 허망하고도 가벼운 것이었는가에 대하여. 한 아이가 15미터의 건물 사이를 맨몸으로 넘어갔다. 아이는 목숨을 걸고 넘어간 옆집에서 콜라를 마시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지옥 학대 9살 여아 탈출 후 가장 절실했던 것은 ‘배고픔’」, 『연합뉴스』, 2020.06.11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1키로를 걸었다. 편의점에 도착한 아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아버지가 날 때렸다고, 작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계부와 친모로부터 잔혹한 학대를 당하던 아홉 살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물이 담긴 욕조에 아이를 가뒀고, 어머니란 사람은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아이의 발을 지졌다. 「발바닥 지지고 쇠사슬로 목줄∙하루 한끼...9살 아동 학대 참담」, 『연합뉴스』, 2020.06.11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날이 지날수록 인권은 보편적인 가치들로 변화하고 있다지만, 이런 경우가 생길 때만큼은 인권이라는 말조차 무색해진다.



 인류가 인간의 권리를 주창하고, 학생들이 장갑차의 캐터필러 앞에 드러누운 이유는 인간을 적대하는 외세 혹은 신인류에 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한 아이의 인권을 완벽하게 구해내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반토막나버린 아이의 권리를 무슨 수로 돌이킬 수 있을까.



 국가라는 권력은 마음만 먹으면 민주주의를 기동적이고도 확고하게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지켜나가는 측면에서, 단일화된 강력한 권력이 만능은 아니다. 인권실현의 차원에서는 국가와 시민이 나뉘지 않는다. 정부는 제도와 법률로써, 시민은 공감과 이해로써 인권의 '일상점유'를 끌어올려야 한다.



 이번 사건을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인권보장은 정부만의 접근영역이 아니다. 너와 나의 일이고, 우리 모두의 사회적 실존을 위한 일이다. 아무리 복지제도가 발전하고 새로운 선언이 등장한다하더라도 일상 속의 인권을 지켜내는 최전선은 바로 우리들이다. 아홉 살 아이가 커나갈 앞으로의 미래는 4월의 벚꽃들만큼 인권이 조금 더 만연하기를 바란다.




Ⅲ. 글을 닫으며

: 우리는 끝없이 ‘절반’이다


 여전히 21세기의 한국은 새로운 권리를 만들어 나간다기 보다는 이탈해있던 권리들을 되찾아오는 과정에 더욱 가깝다. 권력과 사회적 억압에 의해서 자취를 감추어버린 권리들을 차츰차츰 복귀시키는 프로세스 위에 우리들이 서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양한 시선에서 살펴보아도 세계인권선언은 아직 '만인의 유토피아' 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들은 보다 객관적인 혹은 주관적인 자세를 굳이 취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그저 몸이라는 덩어리와 마음이라는 결정체가 먼저 반응할 만큼 '상식적'이다. 번식과 생존이 인간의 고전적 본능이라면, 인권의 실현과 민주적 움직임은 인간의 21세기적 본능이다.



 국가의 우선적인 제반시설은 경찰서도, 국회도, 공항도 아닌 바로 '인권과 민주주의' 이다. 독보적인 수준의 국내 치안상황, 세계적인 괴질에 맞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간 의료진들, 어디를 가도 친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업들까지도 국내의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인프라를 토대로 한다. 단적으로 보자면, 인권과 민주의 발전이 국가의 성장으로 귀결되는 흐름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저항운동에 참가하는 도중 , 런던에서 목숨을 잃었던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정의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이는 우리들의 목표인 인권을 보존하는 일, 인권의 일상점유율을 높이는 일이 절대 '몽상가적 발상'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작정 낙관할 수는 없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지 않는다. 계절의 순환처럼 '기어이 오고야 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수류(水流)를 거슬러오는 연어를 기다리는 동안은 깨끗한 강물을 유지하는 것처럼, 인권과 민주주의가 전면화될 수 있는 환경을 끊임없이 준비해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인권은 보석보다는 모래에 가까워야 한다. 투명한 유리창 속에 전시되어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보석이 아니라, 드넓은 공간을 메우는 모래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 위에서 아이들은 모래성을 짓고, 어른들은 낮잠을 잔다. 여유롭고도 아름답다.



 가끔은 인권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우리 곁에 항상 자리해있는 것 같다가도 안타까운 일들이 이따금씩 생겨난다. 한 걸음씩 나아가면, 한 걸음씩 멀어지는 존재. 여전히 많은 파도를 비추지 못하는 등대. 그러한 의미에서 대한민국 인권의 일상점유율은 꽤 오랜 기간 '절반' 정도만을 유지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인권이 '모래'가 되기 전까지 우리는 끝없이 '절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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