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jin Mar 14. 2024

[책 리뷰]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본문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6년 만의 신작이자, 1980년 문예지에 발표한 동명의 중편소설을 43년 만에 마침내 완성해 낸 소설이다. 책을 읽기 전 미리 읽은 친구에게 감상평을 물었더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작품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하 <세계의 끝>)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라며,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자기 복제가 너무 심한 거 같다며 두 작품에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했다. 때마침 하루키 장편소설 처녀작부터 차례대로 읽고 있었기에 <세계의 끝>부터 먼저 읽기로 했다.


<세계의 끝>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세계의 끝')에 존재하는 '나'의 이야기와 그 도시가 창조된 배경, 그리고 그 도시에 이르게 되는 ‘나’의 이야기가 병렬되다가 마침내 하나로 병합되는 구조다. 소설은 마치 현실과 '세계의 끝'이라는 비현실적인 도시가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일상 속 우리의 발 밑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지하 세계도 존재한다. 이 지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 모두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세계인데, 그는 마치 이 세계가 예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놓는다. 그 몽환적인 세계를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하루키의 필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마치 내가 그 지하 세계에 떨어진 양, 혹은 '세계의 끝'에 숨은 주민이양 두 도시를 정처 없이 배회하며 엄청나게 몰입했다.


<세계의 끝>에서 두 이야기가 하나로 병합되며 현실의 '나'가 마침내 그 세계의 끝에 이를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며 끝이 나는데, 나는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게 좀 아쉬웠다. '나'가 그 도시에 당도한 이후의 이야기가 병렬되던 이야기였던 건지, 아니면 현실의 '나'가 마침내 그 도시의 '나'와 재회하게 되는 건지 좀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침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그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을 기대하고 첫 장을 펼쳤다.


소설 도입부를 보면 '세계의 끝'이 창조된 배경을 ‘나’의 어린 시절을 통해 보여주는 프롤로그의 형식으로 착각하게 한다. 단박에 흥미로웠다. <세계의 끝>에서 창조된 그 도시는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시간이 흐르지 않고, 삶과 죽음이 없으며, 자아도 필요 없고, 슬픔과 행복의 감정마저 배제된 정수의 세계였는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열여섯에 만난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그녀의 상상(혹은 실제로 그녀가 경험했던 세계)에 기인해 창조된 도시였다. 그녀와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그 도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지는데, 마침내 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로써 존재하게 된다. 어느 날 소녀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그들이 창조한 세계에 의하면 '나'가 만났던 소녀는 그 도시의 살고 있는 소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그녀의 본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도 그 도시에 가야 했다. 평생 소녀를 잊지 못했던 그의 간절함이 그녀를 찾기 위해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를 실재토록 창조하게 되었고, 어느 날 불현듯 그 도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두 권 사이 존재하는 차이점을 따라 읽는 동시에 두 이야기가 언제 하나로 합쳐질까 궁금해하며 읽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세계의 끝>에서 ‘나’가 그 도시 이전의 세계를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이전의 세계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그 도시로 빨려 들어가게 연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또 세부적으로도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있는데 그 예로 <세계의 끝>에서는 ‘나’가 읽어야 하는 꿈이 ‘두개골’이었다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달걀모양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두 작품이 완벽하게 다른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친구는 작가의 자기 복제에 대해 언급했지만, 두 작품은 동일의 소재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하루키만이 할 수 있는 소설의 형태였다. 그래서 <세계의 끝>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 신작에 온전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1Q84>를 넘어서는 하루키의 가장 기묘하고 비현실적이며, 더불어 굉장히 사실적인 세계의 재창조였다. 이어서 그의 비현실적인 그 도시를 해석하려는 노력조차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도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도시에 허락받은 이들은 누구일까. 왜 꿈을 읽어야 하는가. 꿈을 읽는 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꿈을 읽도록 선택받은 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림자라는 건 뭘까. 그림자를 벗은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또한 본체와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림자가 나일까, 그림자가 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이 무수한 질문에 하루키는 단 한 가지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그는 그 세계를 그릴뿐이다. 또 한 가지, 대게는 그 비현실적인 세계를 포기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마땅한 상황을 예견한다. 그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외의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으로밖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계에 봉착하는 탓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그런 선택도 하지 않는다. 그 무의식의 세계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도시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곳이고 그 도시에 선택받은 자만이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감탄해 마지않았던 부분이 있다. 그 도시에서 분리되었던 ‘나’와 그림자가 그 도시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탈출을 감행하지만, 종국에 ‘나’는 그 도시에 머물기로 하고 그림자의 탈출을 지켜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별안간 그 도시에 남기로 한 내가 다시 현실 세계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책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야 다시 그려진 그 도시에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탈출한 것은 '나'의 ‘그림자’였지만, 다시 현실 세계의 본체가 되어 있다. 아니, 본체인양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그림자’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지만 둘을 구분하는 것이 마침내 의미가 없어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인가 누군가의 ‘그림자’인가.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그림자와 그 도시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분리되어야 한다. 마음의 잔향을 없애기 위함이다.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희의, 자기 연민, 그리고 꿈과 사랑의 감정이 그 도시에서 무용한 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병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림자를 분리하고, 남아 있는 영혼을 긁어내 도서관 깊은 곳에 넣어두는 것이다. '그림자'를 통해서만 영혼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자'가 없는 '나'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영혼과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그저 도시의 부속품에 불과할 뿐이지 않은가. 과연 인간의 정수는 순수한 육체에 있는 걸까, 아니면 영혼이 담긴 그림자에 있는 걸까. 하루키는 이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전달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언컨대 대단하다. 그 세계가 너무 궁금하고, 이해하고 싶어 안달 나게 하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하루키가 얄궂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해독의 난해함을 탓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그려진 세계만 충분히 받아들여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는 또 하루키 밖에 없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하루키의 소설은 여전히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랑이 또 희망적이거나 그저 순수하고 고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원천인 일생의 단 하나의 사랑이다. 그의 글이 난해하게 읽히기도 하지만, 묵직함과 충만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사랑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인생 과제는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그녀와의 재회였기에, 그 무의식의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그곳에 이르게 된 거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물론 그곳에서 나의 쓸모가 다하여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에게 그의 역할('꿈을 읽는 자')을 계승하고, 그 도시에서 나오게 된다는 설정까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소년은 과거의 또 다른 나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눈앞에 펼쳐진다. 향긋한 바람내음이 맡아지고, 투명하고 차가운 강물이 종아리에 닿고, 푸른 하늘과 너의 빨간 샌들로 이어지는 여름 해 질 녘 강가의 풍경이 보인다.


너는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을 대충 쑤셔 넣고 모래톱에서 모래톱으로, 나보다 조금 앞서 걸어갔다. 젖은 종아리에 젖은 풀잎이 달라붙어 근사한 초록색 구도점을 만들었다.
너는 여름풀 위에 주저앉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은 새 두 마리가 상공을 나란히 재빠르게 가로지른다. 네 옆에 앉자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든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너의 빨간 샌들과 나의 흰색 스니커즈가 모래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작은 동물들처럼. 둘 다 복사뼈 아래가 곱고 하얀 모래에 묻혀 있다. 슬슬 여름날 해 질 녘이 다가오고 있음을 하늘의 빛깔이 알려준다.
그런 시간에도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여름 해 질 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은 슬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