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데이트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세종대에서 오전 일찍 시작한 밸리 워킹 공연 연습은 한낮이 지나고서야 끝이 났다.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논현동 던에드워드 전시실로 달려갔다.
꼭 가고 싶은 ‘이정인 작가 초대전’이다.
얼굴은 집에 두고 나온 데다 트레이닝복에 점퍼 차림새였지만, 나와 약속한 아티스트 데이트를 즐길 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아티스트 데이트라 이름 붙여진 이날의 기록을 기억해 본다.
허은순 선생님의 따뜻한 환영 속에 시작된 이 만남은, 공간의 자유로움 속에서 사고의 깊이를 더할 귀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돌아보면 자연과의 연결성을 주제로 한 이정인 작가의 작품이 그 다리 역할을 하며, 허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다.
전시실 2층엔 많은 띠봉이 (허은순 선생님 팬 명칭)들이 옹기종기 앉아 장소를 협찬하신 친환경 페인트회사 대표님의 ‘환경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공간 곳곳엔 작가님의 멋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나의 옆 벽엔 있던 80호 크기의 ‘순수(가칭)’라는 작품에 나는 눈길이 갔다.
이정인 작가님의 작품은 나무를 소재로 하며 물고기 떼를 부조 형식으로 작품을 표현한다.
나무는 생명력이 응축된 재료로서, 작가는 나무의 존재를 존중하며 마주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생명력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림에 대한 호기심은 많았으나 덜컥 그림을 살 만큼의 애호가도 아니었고, 통장을 탈탈 털 만큼 통이 크지도 않았지만, 이정인 작가님의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다.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컬렉터가 되었다.
허 선생님의 매끄러운 진행으로 자리에 모인 분들이 돌아가며 작품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답이 오갔다.
작가가 소중히 생각하는 나무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무는 그 이치에 따라 쪼개지기 때문에 분리 작업을 해야 한다. 모양이 ‘직재’ 인 것도 있지만, 옹이가 많은 나무일수록 손은 더 많이 간다. 단단한 만큼 쪼갰을 때 거칠고 다양한 모양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의 분류를 해야 한다. 나무마다 색을 입는 정도에 따른 분류까지도.
나무에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중력의 흐름대로 살아가지만, 나무만큼은 수십~수백 년의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뻗어 올라가기에 작가는 영험함을 느끼기도 하고 나무를 다룰 때부터 굉장히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된다.
작업을 하다 가시에 찔려도 신경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주의로 인해 찔렸다는 마음이 들면서 오히려 미안해진다고 한다.
“나무의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힘들 때 나무 밑에 가 앉아보세요. 나무 밑에 가면 나무가 뿜어내는 그 어떤 것들이 있어요. 수만 년 전부터 우리가 가장 먼저 접했던 나무는 우리가 죽어서도 나무 안에 들어가잖아요.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지요.” 나무를 느끼며 작업하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허 선생님이 나에게 발언권을 주셔서 작가와의 자리가 더욱 특별해졌다.
“우리 집 현관 중문을 열고 들어오면 초록 물고기들이 항상 반겨주고 있어요.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작품 속의 물고기 눈을 그리실 때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담겨 있으셨을까요?” 나의 질문에 기다리기라도 하셨던 것처럼 작가님은 물고기 눈에 대해 말씀드리기는 해야겠다며 말문을 여셨다.
“살아있는 물고기의 에너지와 생명력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서로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하듯이 이 물고기들의 눈은 오랜 옛날 선조들에서부터 내려왔던 이야기들 속에 있어요. 이사를 하면 냄새가 나는데도 제일 먼저 부엌에 북어를 걸어 놓고 싹싹 빌었고, 마을에 당산제를 지낼 때도 북어는 빠지는 법이 없었지요.
북어가 되기 전 명태는 마를 때 눈이 확 커져요. 실제로 눈은 그대로인데 몸이 마르니까 눈이 커 보이는 것이지요. 눈 감으면 그새 나쁜 기운이 들어올까 봐 이렇게 활짝 동그랗게 부릅뜬 눈으로 사람을 지켜준다는 해석을 한 것이지요.
두 눈 부릅뜨고 우리 마을의 안녕과 우리 집에 나쁜 일이 안 생기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의미적 해석을 한 것이었고, 그래서 작품 속 물고기들의 눈 또한 ‘지켜 준다.’는 의미의 눈이에요.” 우리 삶과 자연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본다.
작가의 말을 들으며, 우리 집 초록 물고기들이 현관 앞에서 동그란 눈으로 들며 나는 우리 가족의 하루를 든든하게 지켜주리라는 믿음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번 아티스트 데이트는 특별한 의미였다.
예술가와 직접 소통하며 작가의 비전과 창작 과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의 생명력과 작가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예술 작품들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성찰의 시간이었다. 앞으로 예술의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감정과 생각을 내 삶에 녹여내기를 희망한다. 앞으로도 이러한 아티스트 데이트를 통해 다양한 시각을 넓혀가고 싶다.
이번 주에 미술관으로 혼자만의 이티스트 여행을 떠날 마음이 생기셨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