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밥을 닮았다
어쩌다 공복 상태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손끝이 슬쩍 떨리고 살짝 어지러울 때가 있다. 속이 허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밥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급하게 취사 버튼을 눌러놓고도 끓는 시간을 기다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드디어 “밥이 완성되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리고, 뚜껑을 열어 뜨거운 김과 밥 냄새가 훅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솟는다. 나는 영락없는 밥순이다. 배가 허기지면 몸은 빛의 속도로 반응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생각할 틈도 없이 주걱에 붙은 밥풀 하나를 떼어 입 안에 넣으면 금세 만족감이 밀려온다.
그런데 글 앞에서는 왜 이렇게 굼떠질까. 머리는 진즉부터 써야 한다고 신호를 보내왔고, 마음은 말로 쏟아내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데, 막상 키보드 앞에 앉으면 손가락이 천근만근이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더 멈춰버리는 건 또 무슨 이유일까. 밥은 몸을 살리고 글은 마음을 살리는 일인데, 둘 다 나를 살리는 일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머릿속에 잔뜩 똬리를 틀고 있는 것들을 꺼내어 ‘설명하는 일’은 본능이 아니라 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능은 주저하지 않지만, 의식은 자주 나를 소심하게 만든다. 엉켜 있는 실타래를 글로 정리한다는 건 그래서 밥 먹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나는 글 앞에서 는 신기하게도 극 I(극단적 내향인)로 변신한다.
글쓰기의 ‘습(習)’이라는 한자는 깃털 날개(羽)가 날갯짓을 반복하는 모습에서 온 상형 문자라고 한다. 새가 본능적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해도, 새끼 새가 하늘을 배우는 데에는 작은 날갯짓의 반복이 필요하다. 몸이 공기를 이해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글도 그렇다. 어느 스님이 “배우는 건 즐겁지만, 체화하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글이라는 형식으로 붙잡아두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다. 글이 비로소 ‘내 문장’이 되는 감각을 온전히 알기까지 나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밥과 글은 참 닮았다. 매일 먹어야 살 수 있듯, 매일 조금씩이라도 쓰면 마음이 살아난다. 나는 가끔 나에게 묻는다. “밥 먹듯 글 쓰면 안 되겠니?”
허기졌다고 밥을 급하게 밀어 넣으면 더 안 넘어가거나 금세 체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잔뜩 쌓였다고 급하게 쏟아낸 적도 있지만, 금세 막막해지곤 했다. 반대로 밥을 천천히 씹을 때 밥알 사이에서 단맛이 올라오듯, 글도 속도를 늦추면 문장의 고유한 결이 살아난다. 천천히 쓸수록 글이 향기를 갖는 이유다.
독자와 글의 관계는 식탁과도 비슷하다. 갓 지은 햅쌀밥에 총각김치 하나만 있어도 훌륭한 밥상이다. 얼마나 밥도둑인지 모른다. 매일 산해진미를 차릴 수도 없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차린 글 밥상이 초라해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속이 편해지는 한 끼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자꾸 ‘완벽한 12첩 반상’을 차리려고 욕심을 낸다는 것이다. 소재를 더 모아야 할 것 같고, 구성도 손봐야 할 것 같고, 조금만 더 뜸 들이면 더 좋아질 것 같아 미루다 보면 글이 금방 식어버린다. 밥도 뜸을 너무 오래 들이면 타고 딱딱해지듯, 글도 오래 묵히면 가장 맛있는 온도가 사라진다. “만족할 때까지…”라는 마음은 결국 글을 태워 먹는 지름길이라는 걸 수없이 겪고 있다.
이 말을 나에게 건네본다.
완벽한 한 상이 아니어도 된다고.
오늘 내가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김치 한 조각처럼,
오늘 써낸 문장 한 줄이면 충분하다고.
힘을 빼야 글도 제맛이 난다.
움츠러들지 말고, 오늘의 한 숟가락을 기꺼이 떠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