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와 구독 버튼으로 대변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유튜브와 각종 SNS는 관심으로 넘쳐난다. 모두가 관심 받고 싶어하지만 정작 관심 받고자 하는 사람은 관종이라며 비난하는 모순 속에 살아간다. 인기가 마치 행복의 바로미터이자 존재 가치의 척도로 인정받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카페인 우울증'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처음엔 카페인이 우울함을 불러일으키나 하고 글을 클릭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카페인'이란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약자로, 그것들을 보고 나면 우울함이 몰려온다는 뜻의 신조어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행복하고 찬란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것이 무슨 문제랴.
햇수로 10년째 학교 현장에 있으면서 여러 해동안 비슷한 이야기로 흠칫 놀랄 때가 있다. 전혀 그런 징후가 없었던 아이의 보호자님이 우리 아이가 왕따를 당한다는데 라고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때. 혹시나 나의 부주의였을까 다시 확인해봐도 그런 상황이 아닐 때. 시간이 지나며 데이터가 누적되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오래 고민했다. 내 고민 끝, 결국 도달한 지점은 아이의 불안감이었다. 내 곁에 당장 누군가 없으면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드는 불안. 혹은 관계적 무게의 불일치-내가 원하는 친구가 내 관심의 전부일 때, 다른 여러 명의 친구가 내 곁에 있다 할지라도 정작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공허한 느낌.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강한 공동체성을 유지해왔다. 혈연, 친족, 학연, 지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여러 폐단이 속출했다. 일부는 악습이, 심하게는 범죄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시대가 바뀌고 많은 사람들이 서구식 문화를 접하게 되며 전통적인 관계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듯 했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인식이 전환되었고, 직장인들은 회사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을 강요받지 않고 개인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 누군가 한 턱을 쏴야만 끝나는 계산대 앞 전쟁에 종전이 선언되고 더치페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젊은이를 규정짓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시대마다 젊은층은 타인의 간섭을 거부해왔댔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동체는 필요했던 것일까. 직접적인 간섭은 없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해도 결국 그들 또한 사람을 원했다. 사람들을. 그것이 '인기'리라. 그 놈의 인기가 뭔지 인기 있는 사람, 인기 있는 상품, 인기 있는 음식은 날로 인기있어진다.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으면 그 것 또는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다. 나 같이.
5G 세상.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만큼 인기있는 사람, 인기 있는 상품, 인기 있는 음식 등은 급속도로 전달된다. 아이들에게도 그렇다. 빠른 속도로 전달되며, 슬프게도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록 학습된다. 인기의 가치는 아이들에게 이미 각인되었다. 아이들은 인기있는 사람을 추종하며,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인기의 중심에 서고 싶어한다. 아웃사이더가 아닌 인싸로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더, 인싸가 아닌 너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냥 너이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다 진짜 너를 잃지 말라고.
엘리트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행해지던 시대가 있었다. 이후, 그 시대에 대한 성찰을 하며 교육 패러다임은 재정비되었고, 엘리트 교육을 벗어나고자 애썼다. 다양한 변화가 있었겠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은 각 사람을 리더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서번트 리더십으로까지 조금씩 변모하는 양상은 보였지만, 그래도 목표는 리더였다. 내 아이를 어떤 리더로 키울 것인가. 그 것이 많은 부모의 고민이었다. 또한 교육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상해본다. 모든 사람이 리더인 세상을. 괜찮을까. 그런 세상은 존재할까. 그렇게 완성된 5천만 리더는 과연 행복한가.
인싸가 아닌 너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굳이 리더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서른 다섯 먹은 나는 타고난 헬퍼다. 내 안에 리더의 피는 별로 없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공동체를 이끌고 싶은 욕구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불행한가. 아니. 나는 헬퍼로서 행복하다. 주어진 역할에 탁월할 때 리더 뿐 아니라 헬퍼도 효용감을 느낀다.
교사로 진로를 결정하며 내게 리더의 자질이 없는 것 같아 망설였던 적이 있다. 교사는 학급 아이들을 통솔하고 내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 움직이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스스로 움츠러들어 눈치를 보며 보낸 아까운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은 화도 못 낼 것 같아요, 라는 말이 나의 무능을 들추는 말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몇 해의 시간을 보내고 어느 날 깨달은 사실은 그냥 나여도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 하나하나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면 나도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단순한 생각의 전환이 놀랍게도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화려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당연히 화려한 교사가 아니다. 말솜씨도 대단치 않은데다가 똑쟁이도 아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성적일 때가 많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교사의 모습을 흉내내며 살았다.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과 만나야 좋을지 생각하는 것조차 시도해보지 못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나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내 생각 속 나는 결핍의 상태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결코 결핍된 누군가가 아니다. 그냥 나다. 너는 그냥 너고. 내가 나를 인정하자 비로소 내가 보였다. 나는 군집인 '사람들'을 움직이는 대용량 에너지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개체인 '단 한 사람'의 마음에 쏟을 만한 에너지는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나였으므로, 나의 방식대로 한 사람씩 만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할애해 우리 반 아이들과 돌아가며 1:1 데이트를 했다. 10분쯤 될까말까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단 한사람과의 시간이었기에 평소에 들을 수 없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때론 깊이있는 이야기도 나눴으며 무엇보다 아이도 나를 전보다 친밀하게 느끼는 듯 했다. 그 시간은 마중물이 되어 나는 아이들을 보다 세심하게 관찰하게 되었고, 관찰은 다시 아이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선순환을 이뤘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니 열 명도 되고 스무명도 되었다. '나'에서 시작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거였다. 그 당시의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못했을 뿐.
리더만 있는 공동체는 얼마나 불완전할까. 괜찮은 헬퍼가 있어야 리더가 빛나고, 헬퍼와 리더가 각자의 역할에 탁월할 때 공동체가 빛난다. 내가 빛나려 하지 않고 내가 있는 곳을 빛내면 된다. 그 일을 하기에 헬퍼의 자리는 얼마나 안성맞춤인지.
나는 네가 주눅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의 내향성은 결함이 아니다. 너를 설명하는 수많은 말들 중 하나이며, 부끄럽지 않은 너다. 어느 날 유난히 네가 흔들릴 때, 사람에 둘러싸인 이들만이 행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내향적인 어른이라서 절대 소문나지 않았던 나의 자잘한 행복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