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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Sep 14. 2021

이제, 기록을 시작합니다.

세 살 된 봄이를 보고 있으면 가끔 세 살 때 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의 기억이 나기도 한다는데 나는 당췌 8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꼭 증발해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처럼. 너무 궁금하면 내 엄마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별 내용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겪어온 바로 엄마는 좋았던 기억에 그리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다. 마음은 여리지만, 오히려 그 탓에 날카로운 경험들로 상처를 많이 받았다. 기억이나 감정의 영역에 두꺼운 철문 하나 달아놓은 듯 굴곤 한다.     


사실 나는 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이 기록'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바인더 노트 한 권을 마련해두었다. 혹시 잊고 싶지 않은, 이를테면 봄이가 처음 "엄마"를 말한 날이랄지, 기특하게 두 발로 걷기 시작한 날이랄지, 이런 기억이 흐려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의 앨범에는 돌 전까지인 듯하고 드물긴 하지만 내 사진과 함께 달아놓은, 엄마가 쓴 것처럼 보이는 한두 줄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그 앨범을 보며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고(엄마는 몇 시에 내가 태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을 언제, 누가 철학관에 가서 지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단 몇 개의, 몇 줄의 기록일뿐이지만 그 앨범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나의 탄생이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마 그래서 봄이에 대한 기록을 더 해야겠다 결심했던 것 같다.  

   

요즘 엄마들은 앱을 이용해 사진을 달고 글을 덧붙여 책자로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 또한 시대에 발맞춰보려고 앱을 깔아두기까지 했지만 결국 하나의 기록도 올리지 못했다. 괜스레 손이 가질 않았다. ‘난 역시 아날로그 타입’이라며 앱은 삭제하고, 봄이 기록용 바인더를 마련하게 되었다. 차곡차곡 채워질 봄이의 모습을 기대하며, 나중에 봄이가 컸을 때 보여주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며.      


하지만 결국, 거기에는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부터 시작된 한 달간의 기록만 남고(그나마도 띄엄띄엄 써서 7일만 적었다) 나머지는 비어버렸다. 그 당시엔 나와 엄마에 관한 글을 쓰느라 바빴다. 봄이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해본다. 분명 그때의 나는 내 아이를 만났다는 환희에 차 있었지만 동시에 엄마에 대한 원망, 엄마가 된 나에 대한 두려움,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불안한 욕망에 휩싸여 있던 차였다. 불안한 나, 엄마를 원망하는 나를 어떻게든 풀어내야 적게 후회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풀어내는 글을 쓰느라 봄이에 대해선 제대로 쓰질 못했다. 그러고는 책장에 꽂혀있는 ‘꿈이 기록’ 바인더를 보며 아쉬워만 했다.      


복직을 하고, 더 분주해진 일상 속에서 봄이에 대한 기록은 하나하나 놓치며 지나왔다.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기억도 많다. 내게는 너무도 의미가 있는 모습들이었는데 이렇게 지나쳐왔다는 게 지금은 놀랍기만 하다. 더 늦기 전에, 더 희미해지기 전에, 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의 기억부터 떠올려 기록해보려고 한다. 대부분 내 기억에 의존해서 적어야 할 테지만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이 절대 고될 것 같지가 않다. 벌써 미안함과 그리움과 설렘과 기쁨의 감정이 차례차례 생겨난다. 지금부터 아이와의 일상은 더 특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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