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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고양이 Aug 09. 2024

엔도 슈샤쿠 <침묵> : 가라앉은 하나님

엔도 슈사쿠 '침묵의 비' 중

침묵(沈默), 가라앉아 잠잠하다

진도 앞바다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을 보며 떠오른 말이다. 애석하게도, 어머니들 모두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 몇달이 넘도록 차가운 바닷바람을 견디며 애타게 기도하여도, 바다는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내가 겪은 하나님의 침묵은 그때였다.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거나, 원하지 않는 일이 닥친다거나 하는 나의 대소사에서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존재에 의심을 가지게 하는 육중한 침묵이었다. 


<침묵>을 읽는 내내 바다가 묘사된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신의 침묵을 바다에 빗대고 싶어했던 것이 틀림없다. 작은 새도, 큰 고래도 어떤 소리나 행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기 마련인데, 망망한 바다, 인간을 압도하는 넓고 깊은 그 대자연은 인간이 고통에 발악하고 비명을 질러도 무서우리만큼 적막하여, 나는 너희와 어떠한 상관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다. 침묵(沈默), 가라앉아 잠잠하다는 그 말은 종교를 가진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신의 침묵에 의문을 던지는 것은 곧 신의 행동에 의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인간이 악과 고통 앞에서 왜 그렇게 신의 침묵에 분노하는지를 생각해볼때, 초자연적이고 전능한 행동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에서의 신을 믿는 이들에 대한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여전히 신이 항상 즉각즉으로 승리하는 방식으로 일하길 기대한다. 오랜 시간 내 인생, 이웃, 사회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처음에는 혼란이었고, 회의와 비관이었으며, 곧 분노로, 그리고 당신에 대한 부정으로 가라앉았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이라고 불렀다.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신을 저주하며 사는동안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혼란과 부조리함을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교회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꿋꿋이 낮은 곳으로 들어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고민이 끝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만남의 장을 만드는 사람, 감당하지 못할 슬픔을 경험하고도 오히려 일상을 살아내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삶과 신앙을 보며, 어느 순간 내 안의 침묵이 깨졌다. 


예수가 나무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냐는 비명을 토했을 때에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대학시절 존경하는 교수님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전능함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전능함”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의 전능함에 침묵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아들의 비명에 침묵했다. 무엇이 하나님이 전능함을 스스로 포기하면서까지 침묵하게 했을까. 전능함이 가져다주는 두려움만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악인에게 천벌을 내린다 한들,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가. 자유의지를 불어넣어 빚은 후 보기에 아름다웠다고 했던 인간이 두려움에 떨며 비루하게 복종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남아있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자유롭게 사랑하는 모습이 신의 형상으로 만든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과 정의를 나누는 존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꿈꾸지 않았을까. 이 지겹고 부조리한 삶에서 크고 작은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구원임을, 악과 고통 앞에서 고작 슬퍼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지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어질 때 잔잔하지만 서서히 부조리한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살아내는 것이 진리임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지 않았을까. 그것이 부활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에게 예수의 삶을 위임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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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십자가 위의 침묵이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이 바뀐 분기점이라 생각한다. 전능함을 포기한 이유는 사랑이었고,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은 사랑이 되었다. 사랑이 곧 하나님 자체임을 이해했을 때, 전능함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 되어 깊이 새겨졌다. 


침묵을 통과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게 하나님은 함께 우시는 하나님이다. 침묵이라는 바다 밑에서 하나님은 가라앉아서 잠잠히 울고 계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노를 넘어서서 그저 그 침묵 위에 삶을 정성스럽게, 꾸준히 덮어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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