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원형격인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은 치열한 토론을 통한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장이었고, 개인의 행복,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한 치열한 토론과 헌신적인 정치참여가 평등을 이끄는 제도를 만들어냈지만, 한편으로 그들울 그토록 치열하게 참여하게 했던 동기는 영웅적 행위에 대한 동경과 찬미와 맥을 같이 했고, 그것은 신만이 점유할 수 있는 불멸성에 대한 유별난 집착의 다른 표현이었다. 결국 좋은 사회의 저변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어떤 직업 혹은 지위는 이웃과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그 성격을 정의하지만, 그런 영역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결국 기득권을 얻고 놓지 못하는 것을 보며, 타인지향적인 삶이더라도 그 저변에는 어떤 내면화된 욕망이 있다라는 걸 가끔 목격한다. 세상을 정의롭게 변혁하라는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어쩌면 동시에 나를 신격화, 영웅화하려는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이면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을 때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내가 있을 수 없는 곳이라고 확신했고, 광장을 뛰쳐나왔다. 실망이라기보다, 나도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나를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라는 애증이 담긴 농담이 신앙고백으로 내 맘에 자리 잡았던 적이 있다. 야망과 목표의식이 한데 뒤섞여 존재와 삶을 뒤흔들어 놓는 신존재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거기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많은 것들을 바친 것에 대한 경외이기도 한 문장이었다. 그 문장으로 버텼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는 더 이상 나를 망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 거의 상관없는 것 같다. 더 이상 욕망과 소명을 분리하고 분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단순한 생존욕구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게 더 나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혼란스럽지 않게 됐다. 다만, 방식을 잃어버렸다.
예수가 내 나이즈음에 세상을 구원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에게 영웅화의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랬다면 차라리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