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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임 Aug 20. 2023

언어를 잃어버린 작가

문맹 - 아고타 크리스토프

가끔 네이버 오디오북에서 한 사람만을 위한 문학이야기 클립을 듣는다. 

조곤조곤 자신이 읽은 책에서 느낀 이야기들을 담백하게 건넬 때 나는 그 책을 사거나, 밀리의 서재에서 찾아 읽는다. 문맹도 그랬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적어 내려간 자전적 이야기의 소설.


바쁜 오전을 보내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안락의자에 앉아 머릿맡에 수건을 펼쳐놓고 머리카락을 올려놓았다. 파란 하늘 사이로 새하얀 구름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연결해놓은 노래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구름이 떠내려가는 걸 보았다. 마치 파도가 치듯 구름들이 나에게로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구름이 파도치면 무슨 소리가 날까. 파도처럼 철썩철썩. 찰싹찰싹. 첨벙첨벙 그런 소리일까.

아마 책을 넘기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소리소문없이 스륵 나에게로 다가와 내 마음에 흰포말을 만들고 가니까.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대로, 눈에 듸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1959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했으며, 뒤늦게 배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문맹은 굉장히 짧은 책이다. 200자 원고지 200매도 안 되는 단촐한 기록. 그 기록 안에는 헝가리어라는 모국어 안에서 살아가던 작가가 망명이라는 고통을 견디어가며 프랑스어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쓴 자전적 기록이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언어를 잃는다는 건 나에 대한 정체성을 잃는 것과 같다. 정체성.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기록과 기억의 총체가 사라지고, 다른 문명에 적응을 해가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네 살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병적일 만큼 독서와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 그녀가 잃어버린 고통은 얼마나 거대하고 또 컸을까. 매일 밤을 울며 불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자신의 모국어를 써내려가다 그걸 스스로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했던 밤들. 


캄보디아로 약 6개월 동안 봉사활동을 떠났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이후로 해외에 나가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어를 쓴다는 것은 비밀스러운 암호같기도 했지만, 홀로 떨어져 있는 고독과 외딴섬을 방황하는 사람같기도 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상대방에게 가닿지 않을 때. 내가 띄운 배가 중간에서 난파되어 조각조각 흩어져 잔해들만 보내질 때. 그 잔해들을 다시 주워모아 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끝내 포기해버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고, 무엇보다 누구의 글도 읽을 수 없고, 누구의 언어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할 때 언어학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투쟁을 했던 것일까. 나라를 잃은 슬픔은 언어에서 나타난다. 누구도 서로 자신의 모국어로 대화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언어의 누수는 작은 구멍 하나로 파괴되어버린 댐처럼 나를 파괴시킨다. 


의자에 앉아 떠가는 구름을 보며 언어를 잃어버린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정체성까지 위협받아야 했던 한 여자를 생각했다.

지켜야 하는 것들을 끌어안고 연고가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만 했던 엄마를 생각했다.

친가족을 잃어버려야만 했던 한 소녀를 생각했다.


그 슬픔들 사이에서 끝내 타자의 언어로 작품을 발표한 작가를 존경했다.

어쩌면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글'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두개의 언어와 하나의 글이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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