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할머니가 되어버린 나
푸른 신호등이 켜졌다. 어서 건너야지 하고 마음은 바쁜데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있는 힘을 다해 걸었다. 겨우 반 정도 왔는데 함께 건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건너고 없었다. 아직 30대인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80 먹은 할머니처럼 푸른 신호등 안에 길을 다 못 건널까 봐 걱정하며 건너는 신세가 되었을까.
무심히 버린 포름알데히드 한 병이 한강의 괴물을 만든 것처럼 재앙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작은 문제에서 발생한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삼켰던 괴물은 살을 빼고 싶다는 작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상체는 55 사이즈, 하체는 66 사이즈였던 나는 55 사이즈로 통일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이어트를 알아보았다. 당시 유명 연예인이 레몬 디톡스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서 디톡스 다이어트가 인기였다. 아이 둘 때문에 운동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나는 약국에서 유기농 해독주스를 먹으면 몸의 독소가 빠져 몸이 가벼워지고 더불어 지방도 빠진다는 말을 듣고 '이거다!' 하고 외쳤다.
7일 동안 마시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똥배를 뺄 수 있다고?
아싸! 못 입었던 원피스도 입고 아직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7일 동안의 해독 주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체중을 재보니 2kg 정도 빠져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지?
위가 작아졌는지 전처럼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좀 많이 먹었다 싶으면 체해 버리고 말았다. 자기 전에 라면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었던 나는 곧 나아지겠지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살이 빠졌으니 얼마나 신이 나서 옷 가게에 갔겠는가?! 옷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블랙 정장 반바지를 골랐다.
"이거 55 사이즈 있나요?"
점원에게 건네받은 55 사이즈의 반바지를 탈의실에서 입어보았다. 딱 맞는 순간의 그 느낌이란~! 오 마이 갓! 감동의 도가니탕! 화이트 셔츠에 블랙 정장 반바지를 매치하여 입으니 얼마나 날씬해 보이는지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나갈 일을 만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살을 뺐냐는 질문에 나는 그저 웃으며 해독주스를 마셨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즐겨먹던 햄버거나 바닐라라테를 먹으면 이상하게 속이 안 좋고 체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평상시와 같이 음식을 먹으면 체해버리니 죽이나 밥 세 숟가락 정도만 먹었다. 속이 안 좋으니 배고 고프지 않았다.
식사량이 적어지니 매달 1kg씩 빠지게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나에게 니가 한 그 다이어트가 뭐길래 이렇게 살이 잘 빠지냐고 물어보고 난리였다. 한 번도 46kg 이하로 체중이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나였는데 42kg이 되고 말았다. 그때 당시 나는 하루에 반 공기도 먹지 못했다. 너무 못 먹고 기운이 없어서 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나? 혹시 위암이라도 걸린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했다.
"선생님, 저 1년 사이에 10kg가 빠졌어요. 몸에 큰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위염 증세 말고는 괜찮은데요?"
"아니, 매달 1kg씩 빠지는데 단순 위염만 있다고요? 무슨 큰 병이 있는 건 아니고요?"
"이상 없어요~. 건강을 너무 염려하는 그런 생각이 문제인 거예요."
걱정하는 나에게 의사는 너무 걱정하는 내 생각이 문제라고 나를 꾀병 환자 취급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해서 저 병원에 다시는 안 가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왜 겨우 밥 세, 네 숟가락만 겨우 먹는 거지? 나는 왜 자꾸 살이 빠지는 걸까?
설상가상으로 복직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휴직을 연장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복직을 해야 했다. 출근 첫날, 나를 본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어머, 너 ○○이 맞아? 못 알아볼뻔했다. 야, 너 얼굴에 뭐 했니?"
"아니에요~. 그냥 살이 많이 빠져서 그래요..."
살이 10kg나 빠지자 동글동글했던 인상이 날카롭게 변했다. 얼굴살이 빠지면서 코가 더 높아 보이니 성형 의혹까지 받게 되었다. 이건 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직원들과 함께 하는 점심시간에는 더 곤욕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딱딱한 음식 등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더 많았다. 세, 네 숟가락 정도의 밥, 된장국 정도만 담는 나에게 다들 한 마디씩 했다.
"그것밖에 안 먹어?"
"뭐야, 다이어트하는 거야?"
" 아니요... 소화가 안 돼서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기에 억지로 담은 음식을 깨작거리다 그마저도 남겨버렸다. 아가씨가 되어 돌아가고 싶었는데 내가 할머니가 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이 직장에 퍼졌다.
단지 3kg만 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다이어트 부작용'의 아이콘이 되어 수군거림의 대상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볼품없는 얼굴, 앙상한 쇄골, 앙상한 팔, 다리. 조직도의 통통한 내 얼굴 사진과 실물의 괴리감이 너무 커서 직원들은 서류를 전달하러 왔다가 나를 앞에 놓고도 ○○씨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방금 나와 대화한 직원이 조직도 사진으로는 나를 찾을 수 없어 엉뚱한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조직도 사진을 다시 찍어 올리기로 했다. 사진 찍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통통하게 나오게 해 주세요...”
아무리 화장을 해도 감출 수 없었던 아픈 모습을 마주한 친했던 직원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도 눈물을 삼켰다. 어떤 직장 선배는 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먹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하셨다.
“TV에서 너처럼 못 먹는 여자를 봤는데 그 여자, 결국 죽었어. 너도 큰일 난다... 안 먹으면 죽어. 잘 먹어야 해.”
잘 먹어야 하는 건 알지만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누가 모르나? 그런데 먹을 수가 없는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답답했다.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숨어 다녔다. 마른 팔과 다리를 숨기기 위해 긴 옷을 입었다.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밝고 큰 소리로 웃으며 수다 떨던 나는 점점 의기소침하고 사람을 피해 다니는 우울한 인간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