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콩트) 영의 DEMO
"내가 <그들>로부터 태생적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하자 모두 이구동성으로 내게 묻더군요. 나 같이 치기 어린 무지렁이가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겠느냐고요. 소외감을 느끼려면 먼저 소속감을 알아야 하는 줄도 모르고 제 멋대로 그려낸 착각이거나 상상인 것은 아니냐고 합디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보편 섭리와 내통하는 직관을 단 한 순간도 완전히 놓고 세상에 편입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그 이해와 납득만큼은 편각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우주가 운행되는 방식의 정당성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음이 때로는 무료하다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위대한 선각자들의 숱한 말씀으로부터 암요 그렇고 말고요 달리 여부가 있겠습니까, 빠르게 수긍한 후 멋대로 맥이 풀리는 심리는 매번 동일했습니다. 열쇠를 찾았다는 유레카의 기쁨도 잠시 뿐, 손에 쥔 열쇠만으로 미로가 바로 정복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학생 시절 분간 국가의 비극적 산물인 이산가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신은 내게 그들이 왜 아플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으로는 그들이 왜 아파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설명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찾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를 외치며 계속 문을 열고 더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들을 점점 더 멀리 떨어진 먼 곳에서 바라보게 되었지요. 어느덧 지구로의 귀환이 어려울 정도로 국외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문득 알아챘을 때, 나는 시무룩하게 주눅이 든 채 미뢰에 허무주의의 섬찟한 맛이 닿는 감각을 알게 되고 말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매사 도리를 따지기보다는 세상 구석구석에 깃든 각 개성들이 지닌 세밀함의 요소에 즉각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면밀하게 관찰하며 암암리의 사각지대에 묻혀 있던 것, 아무도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수집하는 쪽에 훨씬 깊이 매료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마이크로 아키텍처에 빠져든 사람일수록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잊어버리고 나의 미래가 유보되어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는 미래가 나를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만 책임을 지는 법을 모릅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믿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적도 없지요. 실은 어린 시절부터 늘 서랍에 보관해둔 채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인 지침서를 다시 꺼내 뇌리에 펼쳐놓은 순간 소환되는 기억과 일순에 휘몰아치는 지당함은 빠르게 나를 장악하고 깨달음은 이내 덧없이 스러져갈 뿐입니다. 알지만 모른다는 기묘한 박탈감만이 새로운 부하로 지워져 혼란이 가중된 채 기꺼이 무릎을 꿇습니다. 물론 모든 선각자들의 반복되는 가이드는 토라진 채 눈을 흘긴 나의 시선 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치며 주의를 일단 재차 섭리로 돌려주기에 나는 오만함의 수렁으로부터 최소한도만큼 구제받을 수 있음에 두 손 모아 감사해야지요."
"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이런, 딱하게도. 당신의 고질적인 문제를 잘 알겠어요. 당신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을 찾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은 어떠세요? 내가 아는 가장 단순하지만 확실한 앎이 있습니다."
"어디 말씀해 보세요."
"<불가능>은 모로 잠시 제쳐두고 <가능>을 붙드세요. 불가능은 천지가 뒤집힌다 한들 인간적 자유 의지의 일부가 될 수 없지만, 가능은 내 고유의 영지 앞으로 마련된 소유 재산인 까닭입니다. 영구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허락된 운명을 조작할 수 없는 낮고 불완전한 존재라면 광대무변 속에서 세세한 정밀함을 연출하는 섭리의 운행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될 일은 될 법하다면 그리 되었을 것이고, 만약 되지 못했다면 그럴 법했기에 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모든 될 일은 그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능하지 못했던 것에 미련과 고집이 남은 사람은 닭 쫓는 개가 되어 언제까지고 불가능을 원통하게 바라보지요. 이 세상에서 손에 넣지 못한 것만큼 화려하게 보이는 것이 또 있을까요? 불가능은 항상 실재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주목성을 지닌 입간판인 양 근사하게 서 있는 법입니다. 시선이 일방적으로 고정된 자에게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자 비옥한 검은 대지에 널리 심어진 것이 보이지 않는 법이고요. 이는 널리 조망하여 이 시공간의 물리적 세계가 구성되어 돌아가는 방식을 주지하고 그 사리를 적절하게 운용할 줄 모르는 자의 어리석음임을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항상 지금 이 자리에서 될 일이 주인공이라는 말인가요? 불가능이란 전망을 핑계로 비겁하게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요? 정말로 불가능했는지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불가능에 대한 포기인지 가능에 대한 도전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추대하는 방식에 여러 가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공이라 한들 실존을 시현하기 위한 사자(使者)로써의 합당한 뜻을 입기 전까지는 단지 무대 한가운데 등장해 섰을 뿐이라서, 사랑을 말하는 주인공이 되느냐, 투쟁을 말하는 주인공이 되느냐, 부조리를 말하는 주인공이 되느냐, 심지어는 비열함이나 잔혹함을 대변하는 악당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으니, 각본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여기서 각본이란 신에게 바치는 '소망'의 입체화된 도식임에 틀림없기에 내가 간구하는 것을 회성한 후 생각에 그치지 않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실제적 행동에 옮기는 것, 내가 시나리오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러한 설정들의 결과가 아닌 방향 뿐이지요. 그것을 우리는 '가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가능이란 무엇입니까?"
"불가능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물리적 운행이 지니는 한계점의 현현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점은 현시적 차원에 국한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상기하세요. 더 나아간 시공간 혹은 더 깊은 철리의 개념이란 것이 곧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태이기에 무한한 가능의 방향에서 불가능이 명명백백 증명된다는 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불가능은 가능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 대기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엄밀히 말해서 불가능과 가능이란 현안은 결국 이루어지는가 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타이밍이란 것은 일견 시간 속성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진리가 시간 단위의 물리성 안으로 빨려들어 왔을 때, 타이밍이라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 배비하신대로 각자에게 허락되는 모든 계기점은 분명히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는 필연에 의해서 선발되고 개막하지 않았던가요. 당신은 자신의 사례로부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올려진 무대 위에서 가능한 것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에는 인간의 욕심이 아닌 꿈을 끌어 모으는 인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각자가 믿음의 가성비를 강조하는 것은 현실 지향적인 교사가 추천하는 대학 명단처럼 야박한 뜻이 아니라 운행중인 우주의 궤도가 내게 근접하여 제시한 근사한 타이밍에 삑사리 나지 않는 리듬을 타고 동행하는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인지 습관과 행동법을 체득하라는 뜻임을 명백히 하시길 바랍니다. 불가능은 가능으로 환원되거나 환원되기 이전에 탈락되거나 심지어는 망각하여 소멸하기까지의 유예 기간 중에 언제든 마음껏 놓쳐버려도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