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체념과 열정적인 순종
'집착하지 않는 최선'.
변화를 위한 시간이 시작된 이래 늘 떠올리며 노력하는데도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듯, 알 수 있을 듯 잘 모르겠는 듯하여 애가 타곤 했다.
마음을 비우고 체념하되 그것만으로 끝나버리지 않는 시작에 대한 갈망,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되 인간적인 추구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집착을 책임감이라 착각하지 않는 것, 반대로 무책임으로 얻은 안녕이 평안이라 착각하지 않는 것, 자기애와 사랑 사이를 오가는 이율배반적 명제들에 대하여 여전히 내가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평행봉 같던 위기 의식 위에서 비틀거리며 재균형을 잡는 법을 조금씩 체득해 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전과 다를 바 없이 동일한 느낌, 동일한 기억, 동일한 생각, 동일한 촉구, 동일한 방아쇠에 대하여, 그것들이 잠시 소강되어 잊힌 상태가 아니라 한창 기승을 부리는 직면의 중심에 섰는데도, 어째서 적이 불안하지 않은지 이상스러웠을 때, 나는 내가 최선을 탐구하는 중에도 어쩐지 집착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줄곧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서 내게 필요한 법도대로 알아서 수신해 주실 모든 비의지적인 것에 대해서 완전히 체념하고 순종하기로 줄곧 마음먹을 수밖에 없도록 이끌리고 있었다.
느낌, 색인, 감각, 발상, 영감이든 예감이든 악몽이든, 의식에 방문해서 제멋대로 날뛰는 것들을 뭐라 부르든 간에, 그것이 행복한 것이든 불쾌한 것이든 벅찬 것이든 두려운 것이든, 무엇이 떠오르고 무엇에 사로잡히든, 나에게 배당된 순리적 인과의 완전무결한 필연성을 믿고 싶었다.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어야 마땅했다.
알량한 규모의 의식을 운영하는 내 의지 뒤에 우주처럼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가 통제불능의 미지성으로 잠복하고 있고, 그런 내가 하나님의 인도와 보살핌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지극히 적다.
때문에 좋고 나쁨의 판단도, 통제에 대한 집착도, 미래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고 그저 주시는 대로 받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더 이상 힘들여 고뇌하지 않고 구태여 애쓰지도 않겠다, 그저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기만 하다면야'라는 미명의 유혹이 되지 않도록 하는 단 한 가지 중책만을 맡고자 했다.
스스로 움직여보지 않고서야 시공간을 관통해서 완성된 조화로운 그림 중 내가 어떤 부분의 구성을 맡아 기여하고 있는 생산적 존재일지 알아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발견하고자 평생 노력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 세상에, 굳이 인간으로, 굳이 내가 나로서 태어나도록 허락된 생의 이유가 달리 무엇이 있을까?
선험과 경험을 통틀어 주시는 대로 감사히 품었다면, 품어진 것이 무엇을 발아하기 위한 씨앗인지 그 생명력을 궁리하고 실험해 보는데 아낌없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만이 이렇게 보란 듯 약동하는 정신과 육체에 보답하기 위한 헌신의 몫 전부이다.
나는 어쨌든 할 수 있는 만큼, 머무르기보다는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자, 개성을 특정하는 인력에 사건이 이끌려 어떤 관계 혹은 자극의 얽힘 현상이 주어지고 시공간이 열렸다.
하나, 그에 따른 자신의 안위를 집착으로 염려하면 에너지를 상실하고,
둘, 내 안에서 탈락시켜 소멸되면 적어도 에너지는 보존되며,
셋, 더 나아가 이 얽혀듦에 매료되어 버리면 오히려 모르던 에너지를 얻는다.
이 세 가지 경우 중 어떤 것이 '최선'을 다하는 데 가장 유리하겠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하도록 내정된 인간이며 무엇을 실증할 것인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곧 내게 허락된 모든 것에 사랑을 다한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자의 완전한 순종 아래서만 가능한 열광적 비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