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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Jul 12. 2023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나는 잘 모른다

   무엇이 내게 정녕 필요한 것이, 무엇이 내게 불요한지, 나의 본질을 바라보고자 하는 고뇌와 회성 하나 없이 과연 어떻게 그리 쉽게 알 수 있을까? 애당초 나의 개성도 성향도 환경도 나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 아니니 아마 나보다 나를 구성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터,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언제까지고 나는 나의 알량한 명철함이 만들어낸 섣부른 착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령 최근에 나는 '공감받기'가 내게는 그다지 필요치 않은 미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타인을 비교적 관대하게 이해하고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다각적 초점에 맞춰진 나의 재능과 성향이 공명정대한 빛을 발할 수 있으려면 내가 주는 만큼 동일하게 받아야 헛되지 않은 보답의 이룸이 되며 그것이 곧 조화라 계산했고, 나와는 다르게 그것이 어려운 개성에게도 가차 없이 정서적 공감을 구걸하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집착의 부작용으로 어긋나서 격돌하는 두 이기심의 전장 속에서 쌓이는 오해와 함께 피로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신뢰하는 대상에게 마음껏 바랄 수 있는 자유가 도리어 나를 의존이라는 철장에 구속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우매함의 장막은 어느 순간 갑자기 걷혔다. 마치 풍요하고 부유한 자가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끝없는 욕심을 내는 것처럼 왜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더욱 바라고 있는가? 그보다는 내게 없는 것을 나누고 있는 상대방의 개성을 바라보고 그로부터 배움과 감사를 얻는 것이 진정으로 조화로운 균형점이 아닌가? 내게 특화된 방법만이 타인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법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좁아진 시야에서 나는 타인의 장점을 중히 여길 줄 몰랐고 스스로에게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한 주제에 사실은 저도 모르는 사이 그 수혜를 한가득 입고 있었으니, 이는 공기에게 미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처럼 몰지각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오만한 당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더 잘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만이 최고의 미덕인양 우대하고 자신의 이상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무관심하거나 하대하려 드는 내 인지 습관은 조화로운 전체 그림의 균형을 보지 못하고 나를 우월한 주인공으로 두고자 하는 악습이다. 내게 허락된 것들은 보상 없이 아낌없이 나누고자 할 때 비로소 가치 있게 존재하며, 그 대신 내게 부족한 것을 상대로부터 받아 불완전한 인격을 서로 보양하는 과정이 다양한 양자 관계로 맺어져 상호적인 헌신과 기여로 공생하는 생태계의 이유이거늘. 

  그리하여 나는 마치 어리석은 구복기도와 같이 필요하다고 믿어 구걸했던 것은 사실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필요 없다고 허세를 부렸던 것은 사실 내게 꼭 필요했던 것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일련의 찌름을 통한 통증으로 판명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린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 한들, 나는 앞으로도 수천, 수만 차례 기존에 굳어진 악습의 공식에 따라 얼토당토 하지 않는 탐식과 집착의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런 순간, 즉시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무척 유용한 지침이 된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해서, 과거(공감과 이해를 구걸했지만 얻어낼 수 없었던 무수한 경험)를 떠올리게 만드는 현상일 뿐이야.'


  '통증은 기억의 그늘일 뿐 지금 이 순간에 아무런 실체가 없어. 기분(나는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에 긍정적인데 왜 나는 동일한 것을 얻을 수 없는지에 대한 분노와 우울)에 반응하는 것을 반복해 봤자 내 손해야.'


  빛이 있으면 그림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다. 왜 구태여 그림자가 필요한가를 따지기 전에 그림자가 그림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모종의 필연적 운명이 있음을 감지하라. 사람에게 통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통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통증 없는 삶은 소 없는 팥빵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통증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아버리고 아픔을 우대하거나 없애는데 초점이 맞춰진 보상적 노력은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상적 표면에서 헛바퀴를 돌게 만든다. 

  나는 이미 그것을 충분히 맛보았으며 통증 이면의 것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연습을 통해서 내가 추구해야 할 변화에 대한 깨달음과 체득을 얻어가고 있다. 공황장애라는 신경증 이전부터 이미 뿌리 깊게 존재했던 구태의연한 습관도 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내게 깊이 각인된 통증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합당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올바르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악습이 휘몰아치며 나를 좀먹고 잠식하려 들어도 아픈 만큼 반항하고 까딱하면 질 것 같아도 개기며 그 드라마틱한 전개의 재미를 누리는 것이 나의 할 일로 주어졌으니, 그런 소중한 임무를 품고 한 걸음씩 향하게 될 미래를 떠올리면 어찌 지금의 이 시간이 매혹적이지 않다고 감히 고집부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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