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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Jul 15. 2023

진실된 나의 향기가 부르는 이들

사랑믿음교회 제이콥정 목사님의 [관계론] 세 번째 시간

  제이콥 정 목사님의 수업과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들 중에는 유독, 그리 쉽게 도달할 수 없을 내면의 심원한 곳에서 본래의 나와 교감하는 힘의 마디를 조금씩 늘려주는 듯한 특별한 울림의 감동을 거듭 일신하기 위함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내면 안에서 혼재된 가식과 본심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나지만 목사님이 멘토로 존재하고 계심에 세삼스레 어느 때보다 진심어린 감사를 느꼈던 이유는, 내가 지난 수개월 동안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고심하고 또 고심했던 모색의 쳇바퀴를 단박에 정리하고 분별할 수 있는 통찰을 전해주셨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숙성되고 응집된 진리가 단 두 시간 가량에 걸쳐 듣는 이의 머리와 가슴 모두의 정곡을 파고드니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행 착오를 단축하는 꿈의 효율을 누리고 있는가. 


  관계론 3교시 수업은 내가 지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린 탓인지, 아니면 수업을 듣고자 마음먹은 자의 섭리대로 내정된 타이밍을 마주하게 된 건지, 수면 아래에서 올라와 가장 주요한 화두가 되어 있던 문제가 짓누르던 압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결정적 빛이 되어 주었다. 진실에 관한 하나의 직관적 실마리가 잡힌 순간 둘도 없는 기회라고 느껴지는 최초의 희열처럼, 아니면 무릇 그 이상의 감동이 있었을지 모른다. 

  모처럼 활로를 뚫었다고 생각해도 이내 새로운 벽이 나타나 다시 앞길을 막아서곤 했던 어두운 통로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분명하게 새어들어오는 빛을 발견하고 자유를 예감하는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빛은 나를 옭아매고 있던 관계 속 악습에 양분을 조달하던 핵심 구근을 조명했다. 이년 전 공황장애와 처음 진지하게 마주하고자 했을 때, 내가 스스로에게 완고하게 설정해 둔 이상주의의 강령대로 형성된 특권주의를 통해 결핍을 보상받고자 하는 의존을 파낼 수 있었던 것과 역시나 매우 흡사했다. 


  강박적 이상주의는 보통 '내적으로 취약한 자신의 보호에 꼭 필요한 것'이라 오판하는 모종의 허상이며, 자존적 통증을 저감하기 위한 용도에 국한된 좁은 시야에서 설정된다. 

  나를 둘러싼 관계를 바라보고 매혹되어 조화를 발견하기 보다는 순전히 나를 방어하는데만 주력하는 알량한 목적에 순수한 호기심과 유희가 깃들 리 없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러한 오류에조차 나름의 기질적 개성과 재능이 한껏 깃드는 법인지라, 나는 그것이 지극히 '나 다움'에서 오는 열정인 줄 당당하게 착각하고 있었다. 


  반복된 자기 성찰을 통해서 어느덧 나의 이기적 자기애를 반드시 견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깃든 후에는 더욱 그럴 듯하게 자신을 속일 수 있는 교묘함이 요구됐다. 때문에 압력의 보상에 대한 특권주의에 다각적 입체성을 부여하며 강화시켜 나간 것은 변화를 향한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시행착오의 오류였다. 스스로의 유리함이 양심에 찔리지 않도록, 나름의 숭고한 뜻을 더하려고 말이다.

   이해, 수집, 관찰, 탐구, 분석 등 다차원의 통합주의적 시야로부터 공감하기 위해 허락된 능력을 애꿎은 곳에 쏟아 부으며 정작 필요한 곳에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구체적 대안 모색과 실천에 공을 들이는데도 좀처럼 통증은 줄지 않고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 관계가 현실이 되지 못함을 절망으로 푸념했으니, 결국 '될 일'의 털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궁색한 미로에서 언제까지고 헤매는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리가 없다.


  타인과 조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실한 내 모습을 되찾는 노력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숙할 때까지 일관된 긴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내가 본래의 나로서 드러날 수 없는 상태에서 가지는 모든 아이디어는 아무리 좋은 뜻으로 포장해도 결국 저만의 명석함으로 빚어낸 부가적이고 소모적인 처세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목사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내가 타인에게 어떤 학습된 이상에 꿰어 맞춘 이로운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조화로운 현상은 내가 진짜 나로 독립되어 있을 때 비로소 태동하여 시작된다는 단순함과 투명함만이 강조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지만 실상은 전혀 필요 없던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도록 상황을 조성하시고 순종하기를 명하신 후 연단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비워봐야 비로소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다. 

  나의 고장난 레이더가 촉을 세워 엉뚱하게 흐른 곳에 정착한 내적 공식에는 사실 나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나름의 재미가 꽤 있었다. 그야 그곳은 허황된 이상주의의 달큰한 내음이 풍기는 물줄기가 흐르던 땅이었으니까. 그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만두고자 할 때 뼈아픈 것이 당연한 정답이며,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수록 낯선 혼돈은 충만한 과정으로서 마음껏 누려진다는 것을 일찍이 증상을 통해서도 수없이 체감하지 않았는가. 


  내가 미래에 얻게 될 행복과 자유를 잠시 목격한 듯 했다. 그것은 조건, 대가, 보상 없이도 부려지는 매혹적인 마법이었다.

  한편 그것은 이미 지금 이 순간 시작되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기도 했다. 기쁨으로 간구하고 감사로 기도하고 정성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그러니까 나의 레이더가 어느덧 아무런 저항없이 새롭게 가리키고 있을 미지의 땅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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