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회고라고 쓰고, 취업 후기라고 읽어요.
브런치는 야속하게도 내게 글을 쓰라고 계속 눈물짓는데, 진짜 울고 싶은 건 나였다. 글을 쓸래도 쓸 일이 있어야 쓸 것 아닌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똑같은 포트폴리오를 수십, 수백번을 갈아치우면서도 결국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취준생'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2022년 2월 시작되었던 취업 준비는 11월 나름의 고점을 찍었고(이 정도면 어딜 가긴 가겠다 싶은 느낌), 12월 성과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회고를 남길 수 있는 순간, 2022년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글을 남긴다. (퇴고하다보니 그새 2023년이 되었다)
2년간 운영했던 스타트업이 인수되었다. 짝짝짝, 박수받을 일이었지만 내 가슴 속의 디자이너 영혼은 울부짖고 있었다. '너 디자이너야, 디자인을 해야지!'
비즈니스와 마케팅, 개발 등 많은 영역들을 찍어보며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내가 어디가서 그렇게 많은 권한을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해볼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키우는 길과는 많이 달랐다. 이 때 쯔음 나는 사수가 있는 조직에서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크게 느꼈다. (그것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앱을 들여다보니 그렇게 막 나쁘지는 않았다. 그 때는 내 실력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때의 눈높이가 꽤나 높았던 것 같다)
이후 창업팀을 인수하는 회사에서 잡 오퍼를 받았다. 그 당시의 나로써는 꽤 큰 금액과 권한이 제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은 : 첫째로 사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2년동안 운영해왔던 스타트업과 '교육'이라는 카테고리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셋째로는 나 스스로 쟁취한 인정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아쉽게 뒤로한 채, 조금은 안일하고 낙천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취업 준비를 해볼까? 난 어디에 가게 될까?
마음에 두었던 회사들의 공고가 열렸고, 나는 얼마 되지 않는 UIUX 작업물들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기껏해야 두 개의 프로젝트(물론 둘 다 창업 기반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한 프로젝트마다 할애한 기간이 길고, 수행한 역할이 컸지만 그 내용이 알찼다고는 말 못한다)를 포함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기업에게 겁없는 러브레터를 작성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서류에서 탈락하고, 과제 전형에서 탈락하고, 포트폴리오에서 탈락하고 이래저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 때의 포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온다. 이걸로 취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하하!
누구나 그렇듯이, 계속된 탈락으로 인해 자신감은 점점 떨어졌다. 중요한건 그 떨어지는 자존감에만 집중하느라 상황을 타개할 계획을 세울 정신이 없었다. 해결책을 찾아야겠단 생각 자체가 쉽게 들지 않았다. 취업준비가 선사하는 우울과 불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불안에 쫒겨 그냥 맹목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다시 갈아 엎고... 떨어질 서류를 또 쓰고, 고치고. 그러다가 결국 어느 순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가 취업을 수능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8월엔 자그마치 10학기를 다닌 끝에 대학 졸업장을 얻었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했던 것 만큼 성적을 따는 것에 열심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동안 족적을 두고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해왔기에 학교를 떠날 때 시원섭섭한 마음이었다. 그제야 내 나름대로 참 7년 동안 열심히 달려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적어도 잘 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았고 이것만으로도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때 쯤 취업한 동기, 친구, 선배들을 보면서 알게 된 건, 그들이 갑자기 ‘취업 준비의 달인’이 되었기에 합격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누군가의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어울리는 곳에 들어갔구나.' '그 자리가 정말 딱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원래 준비된 자리에 쏙 들어가있는 모양새였다. 이러한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나의 활동들을 한 번 더 돌아보면서 깨달았다. 나의 취업 준비는 이미 스무살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있었다는 것을.
그렇다. 취업은 수능이 아니었다. 나를 대신 표현해 줄 점수를 따는 시험이 아니다. 갑자기 없던 스펙이나 능력을 만들어내서 부풀려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제서야 취업은 '새로운 나'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 승부를 보는, ‘가장 내게 잘 어울리는 곳을 찾는 과정’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포트폴리오 구성, 자소서 작성, 면접 스킬 등 형식에 대한 능력을 키우는 것은 새로운 나를 준비하는 과정이긴 하다. 다만 그것이 최우선이거나 본질은 아니라는 뜻.
2015년으로 돌아가보니, 20살 초반의 나는 ‘일 벌리는 사람’이었다. 워커홀릭이라기엔 맡은 일을 몰입하여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일단 새로운 걸 저지르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일을 벌려봤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고, 운 좋게도 IT 콘텐츠 플랫폼의 기고작가로 선정되고, 두 세 개의 프리랜서 외주를 하면서 다양한 분야, 다양한 사람, 다양한 능력을 찾아내는 행복에 다시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취업 준비를 하며 잠시 잊고있었던 나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 답습보다는 새로움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9월, 새로운 회사에 야심차게 지원서를 넣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나를 보여주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자소서와 지원동기를 만들어냈던 이전 기업들과 달리, 그냥 내 스무살 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었고, 그래서 이 기업이 알맞다고. '나'다운 자기소개서를 들고 1차 합격을 따낸 뒤, 이후 전형에서도 '나'다운 과제를 하고, '나'다운 면접을 봤다. 정면 승부였다. (사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기도 하다)
서류를 쓰고, 실기를 보고, 면접을 보고, 항상 일을 치르고 오면 주변인에게 앓는 소리 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이렇게 실수한 것들만 계속 떠오르는지. 절대 안 될 것 같아. 엉엉. 침대에 누워 새벽이 되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쳐내고 있노라면 과장 조금 보태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엄청 초연해졌고. 12월이 되어서는 성인군자마냥 해탈했다. 다 운명에 맡기는 것이라고. 7년동안 안 나가던 교회도 나가게 되었으니 말 다 했다.
기다림. 사실 이게 취업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취업 과정에서 가장 참담해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 전형이 길고, 깊을 수록 사람이 점점 메말라가고 여유가 없어진다. 되돌아 가기엔 너무나 먼 길을 왔기에 더더욱.
확신이 있었느냐? 하면 확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미련이있었느냐? 하면 미련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지내던 와중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아무 생각 안 들 줄 알았는데 정말 눈물났다. 의외로 '붙었다'는 사실보다 '취준이 끝났다'는 사실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이제 부모님,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된다는 거. 그게 제일 좋았다.
주변인은 다 붙을 줄 알았다고 하던데, 그럼 진작 좀 알려주지 싶었다.(ㅋㅋ)
취업준비를 시작하면서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취업 시장에 몸을 내던지면서, 색다른 분야를 경험하는 커리어를 쌓고 싶고, 취업 시장의 전투경험을 쌓고 싶고,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기업으로 가고 싶다는 세 가지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의 오퍼를 거절한 것에 대해, 인생을 돌이켜보며 ‘멋있는 결정’이었다고 할 만한 결과를 내고 싶다는 소망도 있었다. 감사하게도 내 세 가지 목표, 그리고 소망까지도 이룰 수 있는 적절하고 완벽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힘들고 불안한 일들이 많이 생기겠지만, 하나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한 시점에서 그저 감사할 뿐이다.
추신.
2022년 퇴사를 결정한 뒤 다음 스텝을 찾기 위해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했고, 무엇이 되었는가를 정리하면서 15년부터 22년까지의 내 족적을 정리했었던 도표가 있었다. 재미있게도 ‘프로’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는지 시종일관 아마추어, 주니어가 아닌 프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22년 2월의 내가 있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제일기획에서 서로를 부르는 닉네임은 ‘프로’다. 들어가서 ‘류프로’로 불릴 예정이다. 부디 프로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전문적이고, 내 디자인을 책임질 수 있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기를.
추신2.
과정 중에 거쳐온 많은 기업의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좋은 자리에 대한 오퍼도 있었다. 다만 취업 준비를 하면서 세웠던 목표, 스타트업을 창업하면서 느꼈던 갈증, 그리고 나와 가족들을 위한 증명을 생각하면서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거절하는 것은 항상 힘들었고,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부족한 주니어였지만 믿고 일을 맡겨준 대표님들 덕분에 많은 경험을 했고, 자신감을 챙기면서 긴 기다림을 버틸 수 있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더 멋진 사람, 더 멋진 사업이 되길 기도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