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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울 Mar 20. 2023

인생을 바꿔 준 위대한 오타쿠

넌 포기한 거 아니겠지?

1.

어릴 때 꿈이 만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잘할 재능도, 노력할 재능도 가지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수능까지 친 상태였어요.


2.

그런데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고 수능시험까지 잡쳐버렸습죠. 인생 꼬이다 꼬이쓰.


3.

인생의 선로에서 탈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요.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는 건지 아니면 머리가 좀 모자란 건지. 여하튼 그런 사람이 접니다 저요.


4.

그림도 안 그려지는데 수능까지 망쳐뿌쓰. 정신 차려보니 고3 때까지 대한민국에 있는지도 몰랐던 지방대에 들어와 있더군요.


5.

에이 홧김에 학사경고 3번 질러줬수다. 후후. 그 당시엔 학사경고 4번이 재적이었어요. 또 우리들은 질러줄 땐 화끈하게 질러주거든요.


6.

그리고 군대로 도망을 갔습니다. 저는 최전방 GOP에서 근무를 했어요. 철책선 근처였죠. 


7.

거기서 망원경으로 북쪽 군인들 구경하다 보니 병장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걔들 보면 위안이 됐거든요.

"내 인생 아무리 망해봐야 너희들만 하겠냐?"

8.

GOP에서는 경계 감시가 주 임무라 하루 온종일 멍 때리는 시간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고민 많은 청춘한테 고민하라고 멍석 깔아주니 돌아뿌겠데요. 


9.

그런데 그 맘 때쯤 소대원들의 불만 사항이 늘어나는 겁니다. 저희는 철책 근무 특성상 3명이서 근무를 섰어요. 그중에 사수 부사수는 같은 부대 소속인데 한 명은 외부 인력이었습니다.


10.

즉 그 사람은 병장이 되었든 이등병이 되었든 서로 터치할 수도 없는 남남인 사이죠. 


11.

그런데 그 외부 인력 중에 갓 입대한 이등병이 있었습니다. 막내였죠. 얘가 단단히 도라이라는 겁니다. 후임들이 오타쿠라고 부르더군요. 그래서 같이 근무 들어가는 게 곤욕이라는 겁니다.


12.

저는 아직 그 이등병이랑 근무를 선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후임들에게 걔가 뭐 어떻길래 그렇냐라고 물었죠.


13.

"아! 새끼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바짝 긴장하는 것 같길래 말 좀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영화 얘기만 하는 겁니다. 아오 다른 부대라 뭐라 할 수도 없고"

14.

다른 부대원들의 설명도 비슷했습니다. 그냥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영화에 미친 사람.


15.

그때까지는 별생각 없었어요. 어차피 이제 군 생활도 얼마 안 남았겠다 전역하기 전까지 무생물처럼 지내기로 했거든요. 그러다 우연히 저도 그 이등병이랑 근무를 서게 되었습니다.


16.

저희 부대에서는 제가 최고참이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삐죽삐죽 얼어있더라고요. 그래서 말 한마디 건넸죠.

"아저씨 영화 좋아해요?"

약간 멜로 영화 대사 같네요.


17.

그 뒤로 두 시간 동안 귀에서 피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뿐만이 아니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감독들의 필모그래피. 자신이 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정말 입을 한시도 쉬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기분이 묘하데요.


18.

사람은 끼리끼리 모입니다. 알게 모르게 비슷한 환경에서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모이게 되죠. 그런데 그때 처음 자각했습니다.


19.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열정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는 걸요.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그 이등병을 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 사람의 눈이 저렇게도 반짝일 수 있구나?"

20.

제가 당시 분대장이라 근무 당번 짜는 일을 제가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전역할 때까지 그 이등병 투입하는 시간에 최대한 맞춰 제 근무를 짰습니다.


당시 제 후임들은 그 오타쿠하고 사귀냐고 할 정도였어요.


21.

전역할 때까지 수십수백 시간 동안 그의 열정을 눈으로 귀로 보고 들었습니다.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스스로 한심했습니다.


22.

저는 당시 재학 중이던 학교를 전역과 동시에 자퇴를 결심했던 중이었어요. 이미 부모님과도 상의가 다 끝났죠.


23.

그런데 전역 후 저는 다시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했습니다. 사실 워낙에 공부를 안 하는 학교였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기록은 제가 처음 아닐까요?


3 연속 학사경고 후 졸업할 때까지 전 학기 장학금 받은 사람은. 아쉽게도 전액 장학금은 한 두번 놓치긴 했지만요.


24.

자! 이날을 기점으로 내 인생은 모든 게 변했다!

같은 결말이면 참 좋을텐데, 현실은 영화하고 다르더라고요. 제가 미처 다 못 배운 게 있었습니다.


25.

그저 열심히는 답이 아니라는 걸 몰랐지 뭐람?


26.

여하튼 오타쿠 아저씨. 잘 지냅니까? 전역 후 인연이 끝났지만 당시에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아닌가? 오히려 덕분에 인생 더 꼬인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내 인생 고달프게 만들어놓고 넌 포기한 거 아니겠지?


뭐 뜬금없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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