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오직 나만 있다면 어떨까... 작별인사는 홀로 남겨진 인간의 존재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성은 살아가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마저 나누고 함께하는 삶에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작별인사는 그런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인간의 끝인사로 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인간의 마음을 탑재한 하이퍼리얼 휴머노이드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야기는 수용소로 잡혀온 철이가 민이, 선이, 달마를 만나며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물음은 심오하다. 그리고 꽤나 슬프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움직임을 느낀다는 철이. 이보다 더 확실한 인간임의 증거를 내보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행히도.. 철이는 인간이 아니다(아니라 여겨진다). 철이가 사람에게서 태어나지 않아서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기준이 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신체의 일부를 기계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인간이 아닌가? 반대로 온전의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뇌에 문제가 생겨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철이도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진 않았어도 마음을 가졌으니까. 자신이 인간임을 매 순간 느끼고 있으니까. 선이도 민이도 마찬가지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을 인식하고 마음을 함께 나누며 소통하는 존재들이다.
이 작품의 서사는 인간, 철이와 민이 같은 하이퍼리얼 휴머노이드, 선이와 같은 클론(복제인간)을 비교하며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이 생각의 시간을 거친 후에도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색의 농도는 서로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다움의 본연이기에 그렇다. 비슷해 보여도 원래 인간은 다 제각각이니까. 그런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사는 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니까.
이후 철이와 선이가 달마를 만나며 주고받는 논쟁은 이 작품의 과연 백미라 할만하다. 불의의 기습으로 허망하게 죽은 민이를 되살릴 것인가를 두고 선이와 달마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달마는 생명체를 되살리는 게 진짜 그 생명체를 위한 일인가? 라며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그 무엇이 됐든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 말한다. 바로 생은 고통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통의 근원이 바로 인간의 자아라 꼬집는다. 그래서 달마는 이미 태어난 개별적인 의식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공지능 토대의 클라우드에 모든 의식들을 업로드하고 네트워크화하여 결국에는 기계지능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의식 체계로 통합하려고 한다. 집단지능과도 같은 이 세계에서 개별적인 의지, 계획,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이로써 갈등도 싸움도 고통도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선이는 생은 고통일지라도 민이를 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민이는 아예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아니니까. 자신의 의지로 생을 살다가 자연이 정해준 운명대로 수명을 다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의식을 가진 존재의 의무이자 생의 의미라면서 의식을 가진 존재만이 고통을 함께하고 나눌 수 있다고 여긴다.
자아(의식)가 바로 고통의 근원이기에 육신을 지닌 인간의 종말과 함께 통합된 기계지능의 세상을 만들려는 달마와
세상이 험난할지라도 나를 둘러싼 주위에 대해 생각하고 고통에 공감하며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도 자아의 일이기에 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의식 있는 개체의 의무라 항변하는 선이는 대화는 매우 흥미롭다.
하루아침에 맞닥뜨리게 된 낯선 상황에 철이는 달마와 선이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조금은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데 철이가 아빠인 최진수 박사를 재회하며 이런 마음도 곧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달마를 통해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들었지만 아빠를 다시 만나며 비로소 인간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게 되면서 철이는 비로소 의문을 가진다. 인간이 더 인간적인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게 정말 그 휴머노이드를 위해서 일까. 인간은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도구로만 여기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고서 철이는 네트워크에 자신의 의식을 업로드하여 달마가 얘기한 인공지능 세상을 경험하기로 결정한다. 육신을 버리고 순수한 의식으로서 전 세계의 인공지능과 연결되어 모든 것을 빠르게 학습하고 알아나간다. 몸이 없어서 어떤 제약도, 갈등도 없는 안전하고 신속한 세상에 빠르게 적응해나간다.
철이는 육신을 버리고 자유로운 의식으로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곳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소중했던 일들에 흥미를 잃는다. 영원함은 지루함의 또 다른 말임을 절감한다. 더불어 몸이 없으니 감각도, 행동도 없다. 오로지 생각만이 존재하는 바다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다.
철이가 네트워크를 떠도는 동안 인간은 거의 멸종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거의 마지막 인간쯤이 된 선이가 있는 곳을 알아내게 되고 선이를 보러 가기로 결심한다. 철이는 선이 앞에 나타나 선이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 예전의 몸으로 다시 구성한다. 노년의 선이와 아직도 어린 철이는 그렇게 재회한다. 선이는 모든 존재(인간이 아니라 여겨졌던)가 연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리더로 살고 있었다. 둘은 그때부터 부부처럼 때론 모자관계처럼 의지하며 생을 보낸다.
철이에게 주어진 선이와의 재회, 그리고 이후 선이가 죽기 전까지 함께한 시간은 고통 그리고 유한한 삶이라는 인간의 숙명은 그 마저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받아들일 의미가 있다는 인식을 철이에게 깨우쳐준 듯하다.
그래서 선이가 죽자 철이는 결국 무한이란 삶의 끈을 놓기로 한다.
소통할 대상이 남아있지 않은 이 세상에 나의 존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육신 없는 의식으로 계속 살아간다 해도 머지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되어 자아가 사라 진 것과 같은 상태가 될 터인데. 자아가 사라진 삶은 또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거부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게 인간의 생 일지라도 아낌없이,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괜찮다. 그마저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게 그게 진짜 고통이지 않을까. 우리 인간에게는.
작별인사는 휴머노이드, 복제인간,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미래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래하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라 단정 지어선 안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유기견 보호소장의 말대로 '충분한 인간'이 아니므로 상관없다 여길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의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질문이자 탐구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인간다움, 인간의 기준, 감정과 자아, 생과 존재의의, 찰나와 영속.
이러한 물음들을 맞이하는 독자는 '나'와 '나와 조금은 다른 존재' 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 공동체의 첫 단계부터 그래 왔던 '함께하는 삶'에 대해 고민해보기에 충분한 작품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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