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평일 저녁은 무얼 하기에도 아무것도 안하기도 아쉬운 시간대다. 보통 퇴근 후의 자투리가 휴식시간이 되는 탓이다. 그런 애매한 시간에 나는 주로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적은 시간을 내어도 늘 즐거움을 선사한다. 생각없이 한바탕 웃다보면 어느새 모든 것을 잊는다. 스트레스와 함께.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부담없음이 좋다. 그런데 간혹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예능이 있다. 마치 사진을 찰칵 찍어 그 순간을 보존 한 듯한 장면처럼.
tvn의 예능프로인 '알쓸신잡'이 그렇다. '알쓸신잡'이란 말을 생각하면 그 즉시 도미노처럼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시즌 2의 '천안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방송에서 '어릴적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다. 질문은 이랬다. "지금도 마음 한 켠에 고이 간직한 어릴적 즐거웠던 기억이 있느냐?"
출연자인 유시민 작가는 어릴 적 장난을 치다 형제들이 여기저기 막 널 부러져 잠들어 있으면 아버님께서본인을 품에 꼬옥 안고서 방으로 데려다 눕히셨는데"그 순간 잠에서 깨곤했지만 그 품이 너무 좋아 깨지 않은 척 했다" 라는 이야길 했다. 몸이 들려 움직이는 순간에도 "눈을 뜨지 말아야지"라며 생각 하던 그 느낌이 지금도 너무 생생하다며 잠시간 그 때의 추억에 젖어드는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진행자 유희열이 소리소문없이 안경을 벗더니 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것 아닌가. 정말 급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친근한 이미지로 능숙하게 진행하던 사람에게서 처음 본 너무나 낯선 모습. 그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시청자인 나도 그 현장에서 같이 놀란 것 마냥 표정이 굳었다.그러자 본인은 요즘에는 되려 행복할 때 눈물이 난다며 이내 다시금 웃어 보였다. 유희열의 그 찰나에 어떤 행복이 스쳐간 걸까 궁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왠지 모를 울컥함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그러곤 놀랍게도 내 어릴적 기억이 머릿속에서 마구마구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난 집, 단칸 방, 미닫이문과 tv소리, 방안의 공기 같은 것들이 마치 시공간을 뚫고 다시 내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지치는 법을 모르는 것 처럼 놀다가도 어느새 골아떯어지는 게 아이다. 그렇게 막 아무렇게나 자고 있으면 엄마는 나를 항상 다시금 안아서 바로 눕혀주셨다. 그런데 엄마의 바로 눕힘은 단번에 끝나는 법이 없었던 듯하다.(아마도 그래서 자주 깬 것이지 않을까) 팔과 다리와 온몸을 어루만지며 불편한 구석이 없는지 살피셨던 것 같다. 다음으로 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긴 다음, 온 사랑을 가득 담아 힘껏 뽀뽀를 해주셨던 것 같다. 그러곤 잠든 나에 대한 얘기를 부모님께서 나누셨는데 난 늘 눈을 감은 채 그 얘길 듣다가 다시 잠 들곤 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눈시울이 붉어진 유희열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순간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구나.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지. 마냥 어린 시기, 돌아오지 않는 찰나라 생각했던 그 때가 무엇보다 특별한 순간이었구나.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자식에게 늘 한없는 사랑을 주신다. 어릴 때든, 커서든 같은 자리에서 같은 크기로.
그런데 자식 입장에서는 그 사랑을 온전히 느끼기 쉽지만은 않은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아가는 사랑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청소년기 이후엔 엄마(아빠)의 사랑보단 자연스럽게 내 사랑에 집중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사랑이 또 다른 사랑에 가려지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이 즈음은 아주 어리지도 아주 크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어떠한 방해도 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가장 온전히 느낄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성인이 된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어릴 적 기억은 대부분은 흐릿하고 진작에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이 때의 엄마품에 관한 어떤 감정과 기억은 어제 일 처럼 생생히 남아있다. 마치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못느낄 감정이란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그 귀하고 귀한 느낌을 고이 간직하고자 머릿속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놓은 게 아닐까.
갓난아기가 엄마 심장의 고동소리로 세상을 처음 맞이하는 게 숙명이듯, 엄마 품을 떠나도 우리는 그 품을 영원히 간직한 채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아닌가 싶다.
머리가 커진 이후 아기였던 내가 부러워진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다신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아니면 한결같이 사랑만을 주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살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하얗게 세 버린 엄마의 머리카락이 엄마도 그 때로 돌아가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일까.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 때가 그 장면이 자꾸 마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