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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Aug 15. 2021

불안이 다가올 때 ➁

“고객님, 매매계약서를 보니까 설령 가압류나 가처분이 되어 있더라도 고객님이 잔금일 전까지 해소하면 된다는 특약 조항이 있네요. 이 조항에 의하면 원고가 가압류의 존재 때문에 불안하다는 재항변도 틀린 것이네요.”


원고가 제기한 불안의 항변권(소송에서 실질적으로는 재항변)에 대하여, 고객이 반격을 했다.

계약서에 가압류는 잔금일까지 해소하면 되는 것으로 특약을 했기 때문에, 설사 가압류가 되어 있더라도 원고는 계약금은 제 날짜에 지불해야 한다고 고객이 주장한 것이다.


상대방의 실질적인 ‘재항변’을 반격한 것이므로 고객은 원고를 상대로 ‘재재 항변’을 한 것이다.


삶에서 불안의 항변에 맞닥뜨린 우리의 재항변의 태도는 어떨까? 자포자기하여 절망하게 될까? 사랑과 믿음, 배려와 인내, 평화와 절제, 영원에의 소망과 믿음 등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과연 버려야 할까?


살다 보면 절망하여 이러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제 멋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불안에 떨며 절망한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재산을 축적하며, 명예와 권력만을 추구하는 외피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절망하여 삶의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위 철학자는 다시 이렇게 일갈한다.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세상과의 흥정에서 만사를 자신 있게 해치우는 요령,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령을 체득하기에 이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조약돌처럼 매끄럽게 마멸되어 있어서 현재 유통되고 있는 화폐처럼 잘 통용된다.”


“이러한 사람은 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명예로운 위치에 있게 되며... 이러한 사람들은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 의하면 불안의 항변에 대해 재항변을 포기하고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은 설사 화폐처럼 세상에서 잘 통용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비어 있는 껍데기와 같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소외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절망에 대해 위 철학자는 유명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죽음은 일회적인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인 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 날카로운 비판이다.


고객이 가압류는 잔금일까지 말소하면 된다는 특약에 근거하여 재재 항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끝까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 물론 특약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피고는 재산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특약대로 잔금일까지 가더라도 잔금일에 가압류를 해소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피고의 신용상태가 불량하기 때문에 특약이 무의미 합니다. 제가 불안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은 고객의 신용불량을 이유로 다시 재재재 항변을 하였다. 원고와 피고의 항변 다툼이 끝이 날 조짐이 안보였다.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절망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희망을 품고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이 삶이 아닐까?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개개인의 삶에서도 그대로 투영될 수 있다. 불안의 도전 속에서 강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끊임없이 앞을 향해 헤쳐 나가는 응전의 과정이 우리 삶의 모습일 것이다.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나도 불안한데 하물며 우리의 자녀 세대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자녀 세대들은 우리가 경험했던 불안과 좌절, 그에 대한 인내와 극복의 삶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훨씬 더 클 수 있다. 마음이 더 초조하다.


어떻게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린다.  


그런데 이런 불안을 희망으로 이겨내고 살아간 훌륭한 위인들은 매우 많다.


우리가 모두 아는 헬렌 켈러와 같이 오감의 장애를 이기고 아름다운 삶을 경주한 자도 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우리나라의 시각 장애인으로 미국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고급 공무원의 지위까지 오른 강영우 같은 분도 있다.


요즘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분도 있다. 시각장애인으로 15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하버드와 MIT 등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월스트리트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하고 있는 신순규씨 같은 분이다.


“ 저의 신용상태가 불량하다는 것은 입증이 안 되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신용상태가 불량해서 계약이 파기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원고가 2차 계약금을 낼 능력이 없어서 제가 계약을 해약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제가 신용불량이 아니라 원고가 신용 불량입니다.”


“ 가압류가 된 금액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원고가 2차 계약금을 지불하면 그 돈으로 가압류 금액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잔금이 수십억 원 되는데 1억 원도 넘지 않은 가압류 금액은 잔금을 받으면서도 해결할 수 있고요.”


고객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고객이 계약을 해약하게 된 이유는 고객의 신용불량이 아니라 오히려 원고의 신용불량 때문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주장했다.


절대자로부터 유한한 시간을 부여받은 인간이 설사 불안이 엄습해도 삶의 고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육체의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끝까지 경주하는 삶은 진실로 아름답다.


유한의 세계 속에서 수많은 불안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실현시키고 지켰기 때문에 무한의 가치를 창조한 자가 그 사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 철학자도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누군가 절망에 빠져 있다면 가능성을 찾아라. 가능성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가능성! 그 가능성을 찾으면 절망에 빠진 사람은 다시 숨을 쉬고 살아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다.”


이처럼 불안에 대해서는 희망이 약이다. 희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하는 약이다. 희망이란 눈으로 보이거나 귀로도 들리지 않는다. 희망은 우리의 내면 속에서 잔잔히 흐르는 인내의 물이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면 봄의 새 생명이 다시 돋아난다는 기쁨이다. 희망은 나 혼자 외롭게 소외된 것이 아니라 영원의 존재가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이다. 


불안의 공격에 대해 희망의 재항변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정의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10대는 독립된 개체로 탄생된다는 희망,


20대는 가정과 사회의 튼튼한 중심자가 된다는 희망,


30대는 설사 길이 잘못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


40대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희망,


50대는 지난 시절을 잘 마무리하고 제2의 삶을 산다는 희망,


60대는 건강과 재산보다 더 소중한 삶의 가치가 있다는 희망,


70대는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희망,


80대는 삶과 죽음이 한 친구라고 믿는 희망,   


90대는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원으로 들어가는 희망


원고와 피고의 논쟁이 치열했다. 재판의 변론이 종결되기 직전까지 서로 준비서면이 계속해서 오갔다. 다음날이 재판일인데도 상대방은 전날에도 준비서면을 법원에 제출했다. 마음이 다급 해서였다. 주장할 내용이 많기도 했었다.


나도 새벽 1시가 넘어서까지 고객과 논의를 계속하며 그에 대한 반박 서면을 정리하여 전자로 법원에 제출했다. 전자소송을 하면 인터넷상으로 서면을 제출하기 때문에 시간의 제한이 없다. 재판은 오후에 있었다.


재판일에 법정에서 구두 변론을 했는데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제 판사의 판단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드디어 1개월 후 재판부는 고객에게 승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끝없이 진행될 것 같던 소송이 상대방의 불복 포기로 고객 승소로 최종 종결되었다.


불안의 항변을 극복하고 희망으로 재항변을 한 우리에게 준 법원의 최종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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