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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덕 Jan 07. 2022

남편이 언니가 되었다


남편의 하얗고 통통한 손가락 바빠지기 시작했다.

주방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문 업체와 우리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겠다며 인터넷을 다 뒤질 기세였다. 관련 기사와 블로그 등을 열심히 살펴보는 남편이 참 낯설었다. '회원 전용' 글들을 읽기 위해 맘카페 가입도 심각하게 고려했던 남편. 내가 25년 동안 보아 왔던 모습이 아니었다. 집안일, 특히 부엌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던 남편이었다.


분명 부엌은 내 영역인데 남편이 더 설레어한다.


남편의 공간은 소파와 티브이 앞이었다. 아이가 한참 어렸을 때, 레고 조각을 비롯한 장난감들이 거실을 점령던 시절에도 그 공간만은 굳게 지켰더랬다. 티브이 보는 각도와 누웠을 때의 편안함 등을 따지면서 까탈스럽게 소파를 골랐었다. 소파 위에 놓을 쿠션 역시 등받이와 베개의 기능을 생각하며 세심하게 선택했었다. 티브이는 화질과 스피커의 고성능을 갈구했었다. 우리 집에서 제일 비싼 물건은 소파와 티브이였다. 딱 거기까지 였다. 그 외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남편이었다.


남편에게 소외된 부엌은 오롯이 나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부엌이 더 좋았다. 식구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곳인 동시에 혼자서 커피도 마시면서 쉬는 훌륭한 카페이기도 했다. 그 영역을 남편이 슬금슬금 공략하려 한다. 쓱 와서 요리에 참견도 하면서 머무르고 싶어한다. 주방 용품에 관심이 많아지고, 그릇의 상태까지 확인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낯설다.



익숙지 않은 모습은 또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남편이 울기 시작했다. '가을동화' 드라마를 정주행하던 중이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나는 타월의 한쪽 끝을 잡고 코를 풀었다. 옆에서 남편도 흐느끼고 있었다. ", 언니...울지 마. "라는 말과 함께 타월의 다른 쪽을 슬며시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수건의 양쪽 끝을 각각 차지하고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남편에게서 갱년기를 겪고 있는 내 주변 언니들의 향이 느껴진다.


남편은 따라쟁이. 내가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하면, 바로 그 순간까지 멀쩡하던 남편은 갑자기 기침을 한다. 본인은 열도 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아프냐? 내가 더 아프다." 상황을 연출한다.

따라쟁이 남편은 갱년기까지 나와 같이 겪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는 우리 부부를 보더니 아들이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우리 부모님. 언제 철드심?" 그 말에 울컥했다. 우리는 각자 집에서 장남과 장녀다. 부모님들의 기대 때문이었을까? 철이 일찍 들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다소 무거운 철을 머리에 이고 살았었다. 감정을 표출하기보다는 억누르며, 또래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했었다. 그러던 우리가 감정을 뜨겁게 드러내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런 나쁜 년. 저런 싹수없는 놈." 찰지게 욕도 한다. 그래서 좋다. 같이 공감하면서, 꺼이꺼이 울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리 부부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인테리어 공사로 부엌은 한결 밝아졌다.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서 커피를 같이 마신다. 딱 그 거리가 좋다. 부부는 사랑을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있는 관계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같이 하려고만 하거나, 서로에게 너무 잘하려고만 하면 쉬이 지친다. 숨을 쉴 수가 없게 된다. 서로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는 게 좋다.


나이가 든 남자들은 젖은 낙엽처럼 와이프 다리에 찰싹 붙어서 안 떨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햇볕 좋은 날에는 젖은 낙엽을 잘 말려서 떼어내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 된다. 비가 와서 다시 붙으면, 같이 드라마 보고 커피도 마시면서 공감의 시간을 가져본다.


호르몬 때문에 남편은 나에게 가끔 친근한 자매님이 된다. 나 역시 호르몬 때문인지 겁이 없어지고 대담해지고 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든든한 우리 형제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그렇게 친구처럼 의지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부부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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