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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hee Oct 14. 2022

을지로, 새롭고도 오래된


"힙하고 멋지잖아! “

장소를 왜 을지로로 정했냐는 나의 물음에 대한 J의 발랄하고도 간단한 대답이었다. 멋지고 세련되기로는 근처 백화점이나 하다못해 젊은이들 틈에 끼기가 좀 민망하기는 해도 연남동거리 역시 얼마든지 가깝게 갈 수 있는 곳이건만, 굳이 지하철을 환승해 가며 그 오래된 도심으로 이끄는 J를 선뜻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기야 몇 년 전부터 젊고 트렌디하게 변해가는 을지로의 분위기에 대해 익히 들어오기는 했다.

그 ‘힙하다’는 을지로.

“아줌마들끼리 항상 가는 그런 곳 말고, 엄마도 새로운 데를 가봐야지.”

을지로가 새로운 곳이라니.

지하철2호선의 다른 이름인 ‘을지로순환선’이 유래될 정도로 서울에서도 영향력이 막대한 곳이자 지하철을 타면 항상 지나쳐가는 그곳. 대학원 논문을 인쇄한 곳이 학교근처 을지로 인쇄골목이었고, 최근까지도 을지로금융가에서 일을 한 인연으로, 골목골목이 눈에 선하다는 남편의 오래된 을지로부심. 아마도 80년대 중반쯤이었겠지,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의 거실등을 좋은 것으로 손수 고르고 싶다는 엄마를 따라서 가 본 곳도 바로 을지로였다. 휘황찬란한 조명들로 가득한 상가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에 놀랐고, 60년대부터 그 자리에 있어 왔다는 점에 또 놀랐다. 서울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을지로에 가면 뭐든지 다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것 같은 설렁탕집에서 뜨끈한 국밥을 먹은 기억이 있는 곳 역시 을지로이다. 당시 중학생이었으니, 내가 유추할 수 있는 모습만 해도 최소 50년은 넘었을 을지로를 ‘새로운 곳’으로 인식하는 '요즘' 세대인 J에 이끌려 일단 나서 보기로 했다.




지하철역을 나와 빨려가듯 골목으로 들어서자, 자칫 이곳의 분위기와는 이질적일 수도 있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곳곳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학생들, 경쾌한 떠들썩함으로 몰려서서 대화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을 무심히 지나치며 자신들의 작업에 몰두해 있는 원래의 을지로 사람들. 땀과 근면함과 우직함만이 가득하던 예전 기억 속 모습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오랜 시간의 점층을 느낄 수 있는 골목 그 자체가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신세계였다.

그렇다. 어쩌면 을지로는 항상 새로운 곳이었다.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시절에도 그러했고, 신입사원으로 선배들 틈에서 경직된 채 맥주 한 잔을 들이키던 나의 청춘시절에도 새로운 세상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리의 모습이 아닌, 촌스럽고 구식이라며 밀려났던 감성들이 레트로의 이름으로 골목 곳곳을 채우고, 날 것 그대로 노출된 오래된 콘크리트건물들과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잔타일로 장식된 허름한 공장건물들 가득한 이곳. 이른바 ‘뉴트로’로 불리며, 비록 경제적이거나 실용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들만의 문화로서 즐기며 예술성을 찾는 젊은이들에게도 또한 새로운 곳이다. 질서정연하고 깔끔한 요즘의 건물들과는 달리, 을지로 특유의 직관적이지 않은 골목과 다양한 시대의 모습들이 보여주는 오래된 골목들, 심지어 4층이 없는 6층 건물에 조차도 J는 흥미로워 한다.


‘생산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화되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K컬쳐의 힘으로 실감하고 있다. 땀 흘리는 노동으로 유형의 무언가를 창출해 내야하는 그런 시대가 아닌, 예술적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더 큰 가치를 발휘하는 시대, 을지로는 그에 딱 들어맞는, 그들의 완벽한 놀이터인 것이다.

이전 산업화시대의 생산터전이었다면, 지금은 이곳에서 또다른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단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 시대의 유산과 유물들이 그들의 기저와 근간에 있다. 새로운 문화와 상상력의 바탕이자 동시에 그것이 실현되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독특한 물리적 환경과 더불어, 다양한 시대가 중첩되어 온 을지로만의 스토리는 이곳의 고유한 지역성이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다. 그 어떤 화려한 경제적 개발보다도 값지고 미래지향적이며, 지나온 세대가 물려 줄 수 있는 내실 있는 유산이다.





새로운 오래된 것에 반응하는 MZ세대인 J의 감성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X세대인 나는 을지로를 마주한다. J가 정한 약속 장소는 취향저격 메뉴로 가득한, 제대로 ‘힙’한 분위기의 파스타 맛집. 그곳에서 J와 함께 맛본 진한 크림소스 가득한 로제파스타는 그야말로 을지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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