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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브 Aug 13. 2022

귀찮아도 아침밥을 차려 먹는 이유

아침밥이 든든한 자존감이 되기도 한다는 말은 과장일까?

첫 독립을 하고 나서 알게 된 일이 있다.

"엄마 밥 줘"하면 차려지던 식탁에는 세세한 단계와 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식탁이 만들어지는 그 모든 단계에서 방황했고 해답이 필요했다.


언제 장을 볼 수 있지? 언제 뭘 해 먹을까? 이 토핑들에는 어떤 재질의 빵이 어울리는 건지..  

지금 사면 이걸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장을 볼 때마다 끝없이 생각하고, 정리하고, 결정해야 했다.

아직도 컬리앱을 보는 새벽이나 퇴근길 들린 마트에선 늘 심각하고 복잡한 심경이 든다.

살림 초보, 생존력 쪼렙인 게 티가 많이 나나? 내공을 쌓는 중이다.


그럴듯한 브랜드의 새 시즌 옷을 갖거나 인스타 그래머 블한 와인바에서

비주얼 좋은 접시를 마주하는 일로도 행복은 금방 다가온다.
직장에서 맡은 업무를 해결하는 일 외에 성인이 스스로 해냈다는 기분을 느낄 일은 많지 않다.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데이트를 했다고 해서 성취감을 느끼진 않는다.

반면, 집밥은 모든 과정을 온전히 혼자 해내고 마무리하는 단거리 경주 같은 거라서

한 번 치러내고 나면 엄청난 강도의 물리적, 심리적 포만감이 밀려온다.


사실 난 '함께'하기보다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식사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다 큰 어른답게 보이고 싶은데. 현실은 아직도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짱구의 하루를 보낸다.

이런 나 자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른이들에게 셀프 메이드 집밥은 일종의 셀프응원이 된다.


올해는 한식 메뉴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첫 독립 후 몇 달도 되지 않아 나는 빵순이가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빵이 좋았던 건 그만큼 엄마가 차려주는 밥이 당연했다는 걸 말해줬다.

밥이 늘 당연했기에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 건 빵이었달까.

독립하자마자 햇반과 볶음 김치, 김만으로 너무 맛있는 한 끼를 먹는 나 자신에게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철저히 쌀을 먹고사는 밥순이의 정체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한동안 왠지 쌀과 함께 차리는 식탁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엄마들만 가능한, 나 같은 살림 쪼렙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 같았달까.

이제는 나 자신을 알았으니 더 이상 못 한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몸을 움직여 요리를 해봐야 한다.

이런 내가 처음 들이고 싶었던 장비는 솥이었다.

종종 드나들던 와인바에서 내어주던 솥밥 메뉴를 시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라이프 스타일 관련 허세가 있는 것도 인정한다.


와인바에서 경험한 솥밥에 의하면 이런저런 재료를 조합해 솥밥 하나만 잘 지으면 별다른 반찬 없이도 든든한 한 끼, 가끔은 와인 디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인 솥은 내가 자주 쓰는 쌀과 가장 좋아하는 식감을 생각해 고르면 된다.

바쁜 아침, 솥밥을 얹힌다면 스테인리스로 된 솥이 좋을 것이다.

쌀이 부드럽게 으깨지고 폭신폭신한 밥을 좋다면 뚝배기에 밥을 지어야 한다.

내가 눈독 들였던 솥은 일본 브랜드 버미큘라의 무쇠솥이다.

열전도율이 뚝배기보다 높아 밥알이 탱글, 쫀득해진다고 했다.

면과 밥 모두 푹 익은 것보단 약간 덜 익어 탱글함이 남아있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라 버미큘라 솥이 내 쌀 취향에 잘 맞을 것 같았다.


요즘도 평일 아침엔 꼭 아침을 챙기고 출근하려고 한다.

분초를 다투는 일상의 시간, 도구와 마음, 재료와 완성도가 뒤섞여 집밥을 만들고 식사를 마치면 다음 일정을 맞는다.


어떤 일이 생겨도 다 괜찮을 것 같은,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과 함께.

기묘한 무장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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