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를 빌려
친구가 관에 누워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네. 근데 이건 영화잖아. 이게 영화란 걸 계속 되새기고 있어. 현실에선 안 일어날 법한 이상한 일도 생기니까.
2020.01.02
새해 카운트다운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한 해의 두 번째 날이 밝았으나 새로운 시작과 가장 멀게 느껴진 죽음은 여전히 공평하게 일어났다. 25명. 2021년의 첫 번째 24시간 동안 코로나 19로 한국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집계표에 옅은 검은색의 숫자로 기재되었고 기대하지 않은 척했으나 남몰래 희망을 가졌던 올해에도 죽음은 예외가 없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1주일 간격으로 있는 크리스마스와 신정이 금요일이라 비교적 긴 연휴를 맞이해 본가에 내려갔다. 오랜만에 집에 가면 기억력 감퇴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수저통, 재활용 쓰레기봉투, 빨래건조대는 어디에 있는지 몇 번이고 엄마에게 물어본다. 잊고 있었던 시간의 물건들이 예고 없이 눈 앞에 나타나 화들짝 놀라기도 하는데 (실은 내가 그 집에 들이닥친 것이지만) 졸업앨범은 애초에 미래의 나를 위한 과거의 나의 쇼인 물건이라 괜찮지만, 햇빛도 들지 않는 서재 귀퉁이에 놓인 하얀 투명 알루미늄 박스 속 할아버지의 옛 캠코더를 보고는 마음이 또 작게 무너졌다. 가족에게 티 내지는 못하고 졸업앨범 얘기만 꺼낸다. 그를 이야기하자면 우린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죽음은 영화같이 간접적으로 접할 때 감정을 드러내기 덜 부끄러운 소재다. 사랑에겐 작은 철판을 깔면 된다 치면 죽음은 그 상위 레벨이라 내가 눈물을 흘린 대다수는 남의 이야기를 볼 때였다. 정작 내 현실인 장례식장과 성묘길에서는 내 마음을 차단하고 눈물짓는 가족들을 멀리서 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분위기가 느껴지면 말의 손사래로 흔들어버려 공기 중에 없앴고 오늘 뭐 먹지? 의 이야기로 빨리 전환시켰다.
누구에게나 피할 길 없는 이 죽음이 가벼운 탁구 볼이 되어 핑-퐁- 가벼운 소리를 내며 탁구대의 좌우를 넘실거리고 'Life is Good!'을 되새김질하는 영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를 만났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아니고 한 사람의 죽음을 마치 기다린 듯한 문장이 이상해 여러 차례 노려봤다. 영화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딸이 한 때 정신과 의사였던 살아있는 86세 아버지 딕 존슨의 죽음 예행을 담고 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딕 존슨은 계단을 헛디뎌 목이 부러져 죽기도, 길가에 떨어지는 물건을 맞거나 다양하게 죽어보며 가짜 장례식에서 친구가 직접 추모사를 남기고, 가족의 종교인 안식교가 말하는 천국 세트장에서 예수님을 만나 본다. 밝고 다채로운 폭죽이 터지고 코미디쇼에나 보일 법한 황당무게한 죽음들을 제각기 카메라에 담으면서 딸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커스틴은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다.'라고 카메라 너머에서 말하기도 한다.
가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영화를 좋게 감상한 데에는 아쉽게도 딕 존슨의 연기의 훌륭함은 상관이 없다. (연기는 실제로 훌륭했다!) 어차피 존슨 가족과 관객들은 연기에 들어가는 '컷'사인 전후의 현장 기운과 스태프들이 달려와 딕 존슨을 일으켜 세워주며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에 더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에 적힌 죽음의 상황들이 농담이 아니라 농락으로 받아들여질까 노심초사하는 제작진들과 그 순간 "부활했다!" 식의 특유의 유쾌함으로 상황을 마무리짓는 멋진 딕 존슨이 반복되며 영화는 후반부에 다다른다.
그러나 생전에 기억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자신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 병으로 생을 마감한 기억으로 되돌아갈 때는 코미디는 단숨에 다큐멘터리, 그러니까 논픽션이 돼버린다. 커스틴은 현실 세상의 일이 더 흥미로워 다큐멘터리를 업으로 택했지만, 정작 자신의 어머니를 담은 푸티지가 단 한 개밖에 없다는 걸 발견한 이야기를 후반부에 긴 내레이션으로 넣는다. 구석진 옷장 속에서 아이폰을 들고 녹음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적잖은 후회가 그려졌다.
그래서 같은 병을 앓기 시작한 아버지의 죽음을 가정하며 영화에 잠시 기댄 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장 잘 해왔던 일을 보여준다. 커스틴의 가짜 다큐멘터리는 어쩌면 그녀 일생의 가장 진실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또 이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자주 그리고 쉽게 무너졌던 건 딕 존슨의 장례식에서 조문사를 맡은 오랜 친구였다. 그는 타고난 연기 감 인재였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진짜가 아닌 걸 알면서도 손을 떨며 going away를 차마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단상 아랫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 귀퉁이로 내려가 머리를 짚고 흐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