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뤄둔 백날의 내일이 하나라도 오늘이 될 수 있다면
"백날 내일 내일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내 모습이 그때의 내일일까 - 하상욱"
하루 계획을 적어놓는 공책의 앞면, 덕지덕지 붙어있는 명언 스티커 중 가장 위에 붙여진 문장이다. 맨 위에 붙여진 건 단순히 이 스티커의 운이 좋아서도 있겠지만 유독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던 글귀의 힘도 있다.
백날 내일 내일 하면서 사는 사람. 내 회고록 속 나를 설명하는 부분에 가장 처음으로 등장할 법한 표현이다. 아마 그 회고록도 써야지, 써야지 하며 미뤄 미뤄 썼겠지. 그리 자랑스러운 수식어는 아니지만 이 말을 대신해 나를 들출 표현은 찾기 힘들다. 말 그대로 나는 자주 무언가를 미루는 사람이니까. 작게는 빨래나 청소 같은 소일거리부터 크게는 도전이나 꿈같은 이상들까지. 그래서인지 내 삶 속의 여러 사건들은 반 박자씩 늦춰져 엇박으로 나타나곤 했다.
미루는 것. 어떤 것을 당장 시작하지는 않되 포기할 마음도 없어 기어이는 나중의 자신에게 넘겨놓는 것. 내게 이런 미루는 행위는 주로 부족한 용기와 넘치는 미련의 콜라보로 이루어진다.
부족한 용기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다. 시작할 용기와, 포기할 용기.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장 시작해서 잘 해낼 것인지도 자신이 없고, 일을 포기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는 것. 설마 이렇게 복잡한 사람도 있겠나 싶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사람인지라 매번 고민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여기서 결국 시작하지 못한 때에는 머잖아 미련이 찾아온다. 흔히 만일, 로 시작해 했을텐데, 로 끝나는 문장들의 모습으로. 스치는 상념과 비슷한 형태를 한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들러붙어, 기어이는 지난 시간을 잊어가는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이 미룸을 싫어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싫어서 멀리 떼어놓고 손사래를 칠 생각도 없다.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거나 기한이 정해진 과제가 있는 경우에는 곤란하지만, 정말 해야 하는 일일 때는 책임감이 이기곤 하니까. 내 자유도가 없는 일에서 무턱대고 미룸을 데려올 만큼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다. 간사하게도, 미룸은 내가 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주로 자기 계발에 해당하는- 일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항상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내일의 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일을 미루겠어! 식의 밈처럼 나도 일을 미룰 때는 미안함을 가지는 편이지만 그 대상은 미래의 내가 아니다. 주로 과거의, 미룬 것을 후회하며 '다신 이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하는 나에게 사과를 전한다. 미래를 기대하며 내일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 말하던 예전의 나에게 유독 미안한 날이 있으니까. 정말 내일만 외치다 아무것도 오늘로 만들지 못한 채 끝내는 부끄러운 사람이 될까 봐 불안해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매번 바라는 일을 바로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고, 미룸이 아니었다면 결국 놓아버렸을 일들을 생각하면 마냥 그를 미워할 수도 없다. 시의적절하지 않은 때에, 혼란스러운 내게로 불시착해버린 꿈들에게 떠나라 손짓할 만큼 나는 모질지 못하고, 바로 다가오라 안아줄 만큼 단단하지도 못하니까. 그런 물렁한 나로 하여금 그 꿈들을 이루게 만든 것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보다도 억척스러운 미룸 속 미련이었으니까. 절대 지나간 그 내일을 잊을 수 없게, 꼭 다시 한번 떠올려 동경하도록 만든 그 미련의 덕택을 여럿 보았기에 나는 오늘도 미룸을 포기할 수 없다.
오늘도 이루지 못한 환상적인 내일을 미룸의 상자 속에 넣는다. 백 번의 내일을 외치기만 한다 해도 딱 하루만 오늘이 될 수 있다면 그야 일도 아니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