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심리 상담 후기2
되짚어보니, 내 유년시절의 주된 감정은 ‘자기증명’이었다.
둘째인 나는 늘 부모의 관심이 고팠고, 항상 나보다 좋은 성적을 유지했던 언니와의 비교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방치했다거나 항상 비교했던건 아니지만, 나 스스로가 부모님에게 성적(결과)으로 ‘인정’을 받고 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던 듯 싶다.
그 욕구는 조금 어긋나기도 해서, 내 마음 한켠에는 ‘공부 못해도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어! 지루하게 공부만 하다 죽진 않을거야!’ 라는 또다른 마음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명분 하에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도 서슴치 않고 하기도 했었다.
‘자유분방’한 나의 기질과 맞물렸기에 이런 생각의 흐름이 가능했으리라,
어쩌면 이질적인 이 두 마음이 계속 공존했던 게 내 유년시절의 전부였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됐는데, 인정욕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 세게 발현됐고 이것이 더 나를 채찍질했다.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인 성격들이 맞물려 나를 점점 더 소진시켜 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증명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너 자신을 증명해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나에게 자기증명이라는 무거운 돌덩이를 스스로 이게 만들었다.
여기저기 소모되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채 그저 또 누군가가 ‘잘한다’라고 인정하면 ‘더 잘해야 한다’라며,
스스로가 만든 압박 속에서 결국 스스로를 닳게 만드는 과정의 반복. 내 존재의 이유가 그것 하나라는 듯이.
나는 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그대로 존재해도 한없이 예쁘던 시절에, 끊임없이 채찍질 하며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니.
“많이 힘들었지, 많이 괴로웠지.”
그래서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다. 상담시간에 시작된 눈물은 집에 와서도 계속 됐다.
그렇게 울고 나니 후련했다. 무언가가 해소되는 느낌이랄까.
나의 행동 양상이 왜 이렇게 되는지에 대한 원인을 알고 나니 자연스럽게 나를 받아들이게 됐다.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인 내가 매사에 침착한 모습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히 나와 맞지 않다.
더이상 나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됐다.
대신 이건 나의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것이 인식이 되니,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감정을 표현할 때도 예전에는 마냥 솔직하게만 얘기했다면 지금은 좀 더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과정을 거쳤던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이 과정 속에서 나는 나에 대해 맘껏 안타까워했다가 진심으로 이해했다가 끝내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게 되니, 타인 역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런 구김살없이 자라보이는 나 조차도, 내 스스로의 내면 깊은 곳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깊은 상처가 있다.
나에게도 이런 히스토리가 있는데, 남들은 없겠는가.
모두가 다 애처롭고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자신을 긍정하는 것보다 힘센 것은 없다.”
요즘 아침마다 읽고 있는 <아침의 피아노>(김진영 저자)의 한 문장이다.
자긍심의 근원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행복이다.
프루스트 역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놀라운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분명한 건 그 행복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 아니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름’답다에서 ‘아름’의 어원 중 하나가 ‘나다운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나다운 것의 시작은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진정 아름답다는 것은 진정 나다운 것.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정말 어렵고 험난하다. 아마도 나와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나를 혐오하는 순간들이 오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순간들을 기억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나를 사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