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가 함께 각자의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나의 직업은 드라마 프로듀서다. 프로듀서의 일은 정말 다양한데 작품의 제작이 결정되면 나 같은 총괄 프로듀서의 경우, 크리에이터(연출감독과 작가)와 배우(매니지먼트)를 관리하는 것 외에도 작품과 관련된 모든 스태프들을 만나 무언가를 조율하는 일을 한다. 100명이 넘는 스태프들의 협업으로 한 작품이 탄생하기 때문에 작품마다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를 잘 조율하여 이들의 협업을 이끌어내고, 마지막까지 사고 없이 작품을 잘 끝낼 수 있게 관리하는 것이 프로듀서의 임무다.
항상 무언가를 리드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나는 종종 가면을 썼다. 때에 따라 이 가면은 분명 필요했고, 도움이 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숨기고 싶은 내 모습들을 감추려고 할수록 내가 원치 않는 타이밍에 자꾸 불쑥불쑥 그것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일의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날에는 항상 자책했다. 그리고 어쩌다 완벽히 가면을 쓴 날에는 일이 잘 풀려도 불안하고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중심을 못 잡고 헤매던 어느 날,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를 만났다. 최근 tvN <유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해 많은 미생들에게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로 큰 위로를 준 김은주 구글 수석디자이너의 책이다.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이 뒤죽박죽 엉켜버려요. 우울증이 찾아오거나 기분이 나빠질 때를 보면 한동안 글을 안 썼더라고요. 그럼 얼른 뭐라도 써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고 해요. 가장 날 것의 나를 자꾸 만나야 해요. 그래야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어요.”
취준생 시절 나는 독립출판사를 통해 <백수재활용>이라는 아주 작은 단편 소설집을 냈었다. 짧은 이야기들을 쓰면서 내가 사회문제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에 대해서는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무엇을 가치있게 생각하는지 등을 열렬히 탐구했던 시간이었다. 1년동안 백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때가 내 자존감이 가장 강했을 시기였으리라. (그러니 겁도 없이 책을 냈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다. 내가 가장 날것의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구나. 나를 열렬히 탐구했던 그 때의 내가 떠올랐다.
나를 알아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제일 중요한 일이다. 20대에서 30대가 된 지금, 나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프로듀서, 팀장, 아내, 두 고양이의 보호자, 며느리, 둘째 딸, 동생, 일산주민, 독자, 시청자 등 현재 나의 역할들을 행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진짜 나’를 기록해볼 예정이다. 그리고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 닿아 우리가 함께 각자의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