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리의 서른아홉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저녁 시간이 될 무렵, 전화기가 울렸다. 남편이다. 퇴근길에 전화를 한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어디냐고 묻는 그에게 난 집 앞에서 장을 보고 있다고 답했다. 잘됐다며, 그럼 얼른 지하철 역 앞으로 차를 끌고 나오라 한다. 나는 그러겠노라 말하고 쏜살같이 자동차를 끌고 나섰다. 왜 역으로 나오라는 지 남편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레 생각에
결혼기념일이니 퇴근길에 외식하자고 하려나보다
할 뿐이었다.
역에서 조금 기다리니 남편이 온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결혼기념일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고, 거래처에 들러야 한다면서 거래처로 가자고 한다. 그렇게 거래처와의 일을 끝내니 남편은 차를 돌려 집으로 항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여보시오. 외식 안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갈 것이요?
내가 참다못해 남편에게 장난을 거니 남편은 실실 웃으며 오늘이 무슨 날이냐며 능청이다. 그렇게 한바탕 함께 웃은 뒤 우린 우리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옛날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반찬삼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남편과 나는 평생을 맞벌이 부부로 살았다. 젊은 날, 어린 자식들만 집에 떼놓고 일을 하고 돌아오면 집안은 온통 쓰레기 장이었다. 한창 뛰놀 나이의 남자아이 둘이 좁은 방에서 온갖 장난을 다 쳐놓은 탓이다. 어느 날엔 집에 돌아가 보니 단칸방에 무릎만큼의 물이 차 있었다. 아이들이 수영을 하려고 방에 물을 퍼다 부은 것이다. 물을 붓다 보니 자기들도 혼날 걸 알았나 보다. 그래도 첫째는 조금 더 크다고 물을 닦는척하면서 있고, 작은 아이는 커다란 눈만 껌벅껌벅하면서 엄마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웠던 내 젊은 날의 아픔과 추억이다.
난 남편한테 결혼기념일엔 저녁을 먹으면서 매년 하는 말이 있다. 그간 고생 많았노라고. 아웅다웅 먹고살기 위해 당신도 나도 고생 많았노라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한 마디를 더했다. 남편에게 우리도 이젠 죽음을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말했다. 남편은 정색을 하며 무슨 그런 말을 벌써 하냐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갑자기가 아니다.
올봄, 내 사랑하는 친정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신 후로 난 그런 생각을 부쩍 자주 한다. 내 부모세대가 이제 모두 가셨으니, 그다음은 우리 차례가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지만 세월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는 동안, 남편과 둘이서 여생을 아웅다웅 열심히 살아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