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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Jan 04. 2024

통장 정리? 아니 기억 정리



올 한 해 주일학교 총무를 맡게 됐다. 인수인계를 위해 통장을 만들어 오란 말에 붐비는 시간을 피해 은행에 다녀왔다. 자꾸만 새 통장을 만드는 것도 혼란스러웠던 찰나 쓰지 않는 계좌가 있어 그 통장을 재발급하기로 했다. 잔고 1원짜리 계좌를 0원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계좌로 그 1원을 옮겼다. 그러면 계좌는 압축기장해 0으로 찍힐 줄 알았으니. 그런데 받아본 통장에는 내가 통장정리를 하지 않았던 그 금액들이 두 줄로 찍혀있었다.

사실 급여통장이라 되어 있던 이 통장을 언제 만들었는지 기억도 없고, 언제부터 쓰지 않았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저 내가 가진 농협 통장 중 하나였던 이것. 집에 돌아오는 길에 대체 이게 언제 적 쓰던 통장인지 궁금해 인터넷뱅킹의 거래내역을 열어보았다. 참, 오래도 됐네. 2015년 4월 6일 남아있던 돈을 다른 계좌로 옮긴 것을 끝으로 계좌는 오래오래 잠자고 있었다. 내 기억과 추억도 함께. 주로 2011년과 2014년 사이에 쓰던 계좌였다. 휴학을 하고 학원 강사로 취업해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다. 그 몇 년 간의 기억이 활자들 사이에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재충전의 시기기도 했다.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마음을 쉬겠다고 하였으나, 다시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순 없었으므로 일자리를 새로 구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학원 일이 3년이나 이어졌고 그래서 신혼집도 그곳에 터를 잡았던, 우리 가족의 시작이 있던 때이기도 하다. 그땐 젊었으니 낮 시간 초등부터 밤 시간 중고등부까지도 다 커버할 수 있던 짱짱한 체력을 가진 때였다. 대개 그곳 학원에서의 기억들이 다이지만... 출근해서 청소하고 선생님들과 그곳의 맛집에서 배달시켜 온 음식을 나눠먹고 수업을 준비하던 너무나 소박한 그때의 기억에 웃음이 난다. 학원들이 한참 호황일 때였고 초등생도 시험을 볼 때여서 일은 많았지만 나는 그때가 참 좋았다. 청일점 수학 선생님을 빼면 모두 여선생님들이었지만 서로 잘 어우러진 비빔밥 같았다. 아이들은 또 어땠는지. 왁자지껄하다가도 수업이 시작되면 눈에 생기가 돌았다. 5학년 기말고사를 치고는 우리 반 친구 아빠가 1등 턱을 내신다며 떡을 해오셨는데 그땐 정말 내 어깨가 어디까지 솟는 줄 몰랐다. 결과가 보이니 무언가 더 기뻤던 거다. 중학생들 국어 시험은 서술형이 반이었는데 시험대비하며 일일이 첨삭하는데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어느 학기에는 우리 애들 국어 시험 성적이 엄청나게 좋아져서 학원 신입생이 많이 늘었던 기억도 난다. 내 입에서 내 머리에서 나온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과 머리에서 꽃 피는 게 뿌듯했던 날들이다. 그때 초등생이었던 그 꼬맹이들은 어느새 대학생, 직장인이 되어 내 카카오톡 프로필 어딘가에서 여전히 꿈꾸며 자라고 있다. 이것도 우연히 아이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던 연락처가 덧입혀져서 보게 된 거지만 말이다. 기억은 잊히지 않고 어떤 색으로든 곱게 물드는 게 맞나 보다.

그 시절 우리 신혼집은 학원 근처의 언덕배기 아파트였다. 넉넉하지 않은 시작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단 둘이 꿈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았고, 밤늦게 수업을 마치면 남편이 학원 앞에 데리러 와서 함께 걸어 올라가던 그 언덕도 좋았다. 그렇게 바라던 임신을 하고 나선 그곳이 아팠던 날의 시간들로 채워지긴 했지만 내 20대 후반을 고스란히 채웠던 기쁨과 한숨과 눈물의 복합체다.


나이가 들수록 느낀다. 어느 곳에든 기록은 중요한 거라는 거. 자잘하게 놓치고 있던 정말로 기뻤던 순간들이 그런 기록의 끝글자 ‘ㄱ’쯤에 묻어있다. 나도 몰랐다. 내 기억을 재발급한 통장에서 찾을 줄이야. 잊지 않기 위해서지만, 그 기록의 힘이 울음을 멈추게 할 수도 있고, 힘든 시간을 지나가게 할 수도 있으며, 내 삶의 기쁨을 만나게 해 줄 날도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 이제 통장에 기록된 글자와 숫자들 말고, 내 손끝에서 나온 기록들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추억들을 더 많이 끄적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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