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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Feb 18. 2024

기억 조각


눈엣가시

화요일, 새로운 레지오에 들었다. 늘 해왔던 대로, 그러나 두어 달 텀이 있던 채로 내 앞에 놓인 완벽한 준비물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칭찬받았는데, 시작기도를 외우며 나만 아는 흠이 보인다. 지난 레지오 모임에서 조금씩 뜯기기 시작해 그 틈을 점점 벌이고 있는 까떼나 기도문 책자. 해야지, 하고서 기도만 끝나면 모임까지 덮어두길 여러 번. 반년쯤은 된 것 같은, 나만 아는 눈엣가시.
아마도 더 여러 군데, 볼 때마다 생각하겠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불편한 것들이 있다.



내려오는 건 금방이네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야 있는 카페. 찾아가는 길이 킬로수에 비해 너무 멀었다. 평지와 산길의 차이겠지. 금방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도착 시간은 내 머릿속 예상 시간을 훨씬 넘었다.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오는 데 걸린 시간은 또 순식간이었던 그곳을 다녀오는 길에 남편과 나눈 일부 대화를 옮겨놓은 메모를 발견했다. 앞에 내가 무슨 소리를 했길래 이런 말을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뭐든 그렇지./정말? 뭐든 그럴까?/산이 그렇잖아.
시작에 앞선 우리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시도해보지 않아서 겁이 나고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하지만 시작해 본 뒤에, 아 이것쯤은 별 것 아니다 하는 일들이 있다. 알아차린 뒤엔 마음의 수고가 더는 그런 일. 물론 조금 가다 아는 길이라 자만하고 발을 헛디디거나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면 더 어쩌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타자기

꼬불꼬불한 정원을 지나 큰 고모댁 문지방을 밟고 올라서면 어린 내 눈엔 신기한 언니 오빠들의 물건이 참 많았다. 작은 창 아래 난 책상에 놓여있는 투박한 타자기가 특히 그랬다. 신기하고 멋졌다. 토닥토닥 내가 내리치는 대로 활자가 되어 나타나는 타자기는 그 특유의 소음마저 좋았다. 짜릿했던 순간.
어른이 된 후에도 글을 쓸 때 종종 생각했다. 지금 내가 내리치는 타자소리도 옛날 그것과 비슷하지만 쉽게 지워지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과는 또 다르다고. 타자기는 지워지지 않는 순간, 그 순간을 신중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묵직한 삶의 고민을 해야 할 때 더없이 좋을 물건 같다. 내게는 없지만. 나는 늘 기억을 파먹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을 살면서도 어제를 추억하며 글을 쓴다. 그렇지 않을 사람은 없지만, 좋은 기억이든 흐린 기억이든 그 기억의 단편들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내게 언제나 작은 위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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