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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금택 Apr 08. 2021

결심부터 이미 망했다?

코로나와 나와 식욕과.

뭐 그냥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앞으로 이 시국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내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알지를 못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예방 가능하며 언제까지 이렇게 토끼굴 속 토끼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점차 내 인생 또한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공부가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앞날에 대비하는 게 급선무야. 나는 마트로 달려가 화장실 휴지를 맨 먼저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미국의 사재기 대란에 관한 기사를 봤고, 물과 화장실 휴지를 몇 박스나 쓸어 담는 백인들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채였지만, 설마 하며 한두 군데 마트에 갔다가 허탕을 친 나는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월마트에 갔을 때 마침 직원들이 분주하게 화장실 휴지를 진열하고 있는 걸 보고 예스가 터져 나왔다. 헉, 조, 조금 창피한가...? 그 순간, 오전에 봤던 그 기사 속 백인들에 내 모습이 오버랩됐지만, 때마침 화장실 휴지가 열 개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나는 아니야, 지금 당장 꼭 필요해서 사는 거야, 괜찮아, 라며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나를 달래 가며 진열대로 전진해 장군처럼 가열하게 화장실 휴지 두 팩을 담아 장렬히 집으로 돌아왔다.


왜 공부할 시간은 없는데 시간은 안 가는가. 그리고 왜 식욕은 사그라들지 않는가.


나도 나를 모르겠던 차에, 나는 강력분 또한 동이 난 이 시점에 굳이 베이킹을 하겠다고 스탠드 믹서를 주문했다. 전쟁에 예를 들긴 무엇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린 황량한 이 세계는 마치 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고, 그래서 그런지 온 식구가 갈수록 먹는 것에 환장해 갔다. 주문기를 클릭하기 직전 이것이 배송돼 온 이후의 상황을 잠시 상상했다. 이내 내가 미쳤지,라고 되뇌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클릭.


아니다, 그래도 조금은 합리화를 하자면 애초 구매 제안을 한 건 남편이었고, 이것은 남편이 베이킹을 하겠다고 먼저 선언했기에 벌어진 일이었으며, 나는 절대로 안 하면 된다. 마침 이제 곧 남편의 생일이었다. 코로나로 온 세계가 난리인데 왜 배송은 여전히 빠른 것일까.


우리는 이틀 뒤 배송된 스탠드 믹서와 마트 세 군데를 돌며 겨우 구해 온 강력분으로 식빵과 카스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쌀밥이 주식인 아시안 가족이 평소 소비하지도 않던 강력분을 사재기로 난리인 통에 득달같이 구해 와서 빵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영어공부를 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홀린듯 베이킹을 하고 음식을 하고 술을 마셨다.


결심하자 이내 망한 것 같아. 어쩌나 불안한 마음만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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