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월 May 29. 2021

찍어서 죄송합니다

무겁지만 찍을 만해

5초 안에 정말 많은 생각을 한다.


찍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이 동네에, 이 건물에 살지 않지만,
 저 사람은 이 동네에, 이 건물에 산다.
여기서 잠을 자고, 일을 한다.
이 곳이 저 사람의 삶이다.
모자이크를 해도 알아볼 수도 있다.
 인터넷에 영구 박제된다.
그러니 나에게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카메라에 화를 내는 거다.
그러니 화내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런데 또, 뉴스엔 나가야 되는데.

아, 미치겠다.


2017년. 그때 처음 영상기자 일을 시작했다. 그 한 해는 정치 뉴스도 시끄러웠지만, 사회 뉴스도 시끄러웠다. 바로 그 해에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살인사건>이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아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취재기자 선배와는 현장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 앞에서 멈춰 서자, 이내 인근 주민들과 마주쳤다. 사람들은 매우 언짢아 보였다. 언짢을만하다. 좋은 일로 온 게 아니니까. 작은 휴대폰 카메라도 아니고 방송사 로고가 박힌 카메라다. 이런 카메라가 분명 내가 처음은 아닐 터. 이미 타 사들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갔을 터였다.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진행 중이다. 보도는 해야 하고, 보도는 현장 영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외경이라도 찍어야 한다.


카메라 이렇게 들고 다니시면 어떡해요. 여기 애기들도 있어요.


그분은 이미 방송사 카메라에 질릴 대로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학원에서 일하고 있다며, 이미 학부모들로부터 불안하다는 전화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본인의 생업, 아니, 애기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가 주면 안 되겠냐고 내게 말했다. 죄송하게도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자의식에 심취해 있던 나는, 외경만 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설득에 실패하고나서야 자리를 떴다.



ENG 방송 카메라를 보고

반가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나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어보지, 현장에서 나를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썩 밝지는 않다. 타인의 불편한 표정을 감내하는 게 우리의 일이라지만, 나 역시도 인간이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낸다는 것은 참 쉽지 않다. 타인의 평온한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 것조차 죄송하게 여겨진다.



코로나 19 이후, 이런 죄송한 일들은 더 빈번하게 일어났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모든 장소가 적나라하게 방송에 나가진 않는다. 하지만 작년 초 처음 터졌을 때만 해도 부서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사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인도, 병명도, 감염경로도 모르는 상태에서 현장으로 들어가 마스크 한 장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명확한 룰이 없었다. 확진자가 나왔다 하면, 현장 장소의 영상은 무조건 TV에 나갔다.


기자님도 본인 일을 하시는 거지만,
저도 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생계가 달려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저 학원 문 닫을 것 같아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정말 죽고 싶어요.


내 카메라를 붙잡고 그 강사 분은 한참을 오열하셨다. 내가 그나마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내 영상을 적나라하게 쓰지 말아 달라고 취재기자에게 전화로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해당 건물에 확진자 나온 곳 말고 다른 업체들도 있다. 무관한 분들도 있다. 최대한 전체가 나온 풀 샷을 쓰지 말고, 부분적으로만 찍었으니 그 부분만 내보내 달라. 모자이크해도 동네 사람들은 알아본다. 그러니까 제발 다른 분께 피해 가게 하지 말아 달라.


애원에 가까운 전화를 끊고, 회사로 돌아오는 차에서 펑펑 울었다. 억울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게 그 사람들에게 고통이었구나. 내가 오히려 민폐를 끼치고 있구나. 그런데 또 일을 해야 하네. 취재기자도 없는  현장에서 오는 괴로움을 왜 나 혼자 감당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밀려드는 자괴감을 억누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운전하시는 형님이 나를 다독였지만,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알 권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무관한 개인들의 삶까지

파괴될 이유는 없다.


개인은 '알 권리'의 제물이 아니다. 맹목적인 '알 권리'에 대한 찬양은 전체주의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아는 것이 힘이라면, 힘은 오남용하면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보가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알 권리'를 고집하려면, 그에 따른 합당한 이유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인간으로서 잘 살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알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목적으로 존재하지,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알아야 하지, 인간으로'써'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가 인간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알 권리가 살 권리에 우선하진 않는다.


혹여 취재 현장에서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 카메라를 마주하셨다면, 그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찍어서 죄송합니다.


04. 영상기자는 공익에 관한 것으로 보도의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 한, 타인의 생명, 자유, 신체, 건강, 명예,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음성, 대화, 그 밖의 인격적 가치에 관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05. 영상기자는 인간의 존엄성과 시민의 기본권을 존중하며, 불의로부터 이를 지켜야 한다.

- <2020 영상보도 가이드라인> 中 '영상보도의 기본원칙'
매거진의 이전글 펜처럼 카메라도 강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