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써 본 설교문
24년을 시작하며, 교회 장로라는 직분으로 인해, 생전 처음으로 설교문을 써본다.
. 본문> 창세기 26장 1절 - 18절
. 제목> 우리는 언제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가.
. 이야기요약>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랄에 거주하라는 여호와의 명을 받는다. 그랄에 머무르려 하니, 그의 아내 리브가로 인해 그랄사람들에게 해를 입을 것이 두려웠던 이삭은 리브가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누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랄 왕 아비멜렉이 리브가가 사실은 이삭의 아내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그랄사람에게 공표한다. 이삭은 그랄에서 잘 지내게 된다.
오늘 아침,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에 대해서 질문해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딘 선가 많아 봤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축복을 해 주십니다.
2.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리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개역개정 창세기 16장 2절 - 4절>
잠깐 성경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개역개정 창세기 12장 2절 - 4절>
같은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하셨고, 또 이삭에게 하셨습니다. 세대를 이어 한결같이 축복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만큼이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연약함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낯선 땅에서, 자신의 아내를 탐내는 이방인들에 의해 자신이 해함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주의를 기울일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를 대할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살았던 시대를 역사적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정도 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이것저것 걱정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의 여행에 안전을 보장해 주는 증명서인 여권은 아주 중요해서, 어디를 가든지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여권은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 준다는 증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천 년 전, 한국의 역사로 따지면 단군신화가 나오는 고조선 시대쯤 되는 시대에 낯선 땅에 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인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의 생각으로 "참 철없는 이삭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삭의 두려움은 너무나 절실한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삭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개역개정 창세기 16장 12절 - 13절>
어쩌면 부자지간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닮았을까요?
다시 오늘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성도님들은 어떤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나요?
저는 3가지 경우 두려움을 느낍니다.
□ 첫 번째, 앞길이 안 보일 때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작년에 강원도에서 약초 농원을 하는 지인의 집에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내비게이션을 믿고 별생각 없이 길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점점 길이 좁아지더니,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알림을 중단했습니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어? 여기서 길이 끝인가? 후진으로 차를 어디까지 빼야 하지? 앞으로 나가면 길이 있을까? 이렇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지인은 껄껄 웃으면서 거기서 2~300 미터 더 들어오면 된다고 해 줬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비포장길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이 길의 끝에 나의 목적지가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삭이, 아브라함이 느낀 두려움은 이런 것이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라"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았지만, 정작 눈앞에 펼쳐진 애굽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던 것이죠.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두 번째, 내가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입니다.
인생의 계획을 꼼꼼히 짜 놓습니다. 아이들 대학 졸업까지는 열심히 학비를 지원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나의 노후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지.
40대, 50대, 60대 계획을 짜고, 이쯤 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정년퇴직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감당하기 버거운 학비를 부담해야 하고, 학교를 졸업한 자녀도 여전히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우리의 삶에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아주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약속은 받았는데, 100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으니, 이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욕심이 과할 때입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상대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있지만, 또 현재를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항상 무엇인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필요가 일용할 것을 넘어선 욕심이 될 때 우리는 점점 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옛날, 우리가 모두 어렵게 살던 시절. 동네에는 담장의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나뭇가지로 얽기 설기 엮어논 허름한 담장 안에서도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유한 동네로 갈수록 보안은 점점 더 철저해집니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경비실이 있고, 현관을 들어가기 위한 비밀번호가 있고 또 집에 들어가면 CCTV, 보안업체의 관리 시스템까지 자꾸자꾸 안전을 위한 것들이 더 해집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모은 것인데, 잘 보호해야 하겠다는 본능이 발동합니다. 아브라함, 이삭은 자신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자신들 생명까지 위험하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간의 약함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이야기하신 겁니다. 3절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걱정하지 말아라, 이 땅에 머무르면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했던 일을 너를 통해 이룰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의 두려움을 알고 있어
.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지?
. 정말 여기에 있으면 될까? 의심이 생기지?
. 이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다 잃게 될까 봐 두렵지?
그러나, 걱정 마. 내가 약속해 줄게,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미 보여 줬잖아, 기억하고 있지!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호칭을 얻는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이끌어 줬던 것을 기억해 봐. 그래도 못 믿겠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나의 주라 시인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대속을 얻고,
그 은혜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예수를 알기 전과 같이 흔들리는 믿음으로 하루를 맞이합니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에 대한 답답함이,
좀 더 빨리, 많이에 대한 욕심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믿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아침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 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내가 주님을 알게 된 사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능력,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의 풍요로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아침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벗고, 평안과 감사로 시작하는 하루가 되실 것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