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대표 없이 세금 없다
자신만만했던 황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민들의 저항이 거셌던 까닭이다. 지역패권을 두고 경쟁을 하고 있던 주변국들의 군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속속 보고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폭동이 지속되었다가는 블루헤븐의 혼란을 틈탄 적국의 침략이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내 황제는 결단을 내렸다. 증세안을 철회하고 다음과 같은 주민들의 요구안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로 하면서 폭동은 일단락되었다.
블루헤븐의 모든 법률은 주민의 대표인 민회가 제정한다.
여전히 왕도 법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법의 서열은 민회에서 만든 법보다 아래에 놓았다.
이를 법률유보, 법률우위의 원칙으로 표현한다.
두 법을 구분하기 위해 민회가 만든 것을 ‘법률’이라 부르고 왕이 만든 것을 ‘명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러한 변화는 법치주의의 출현을 의미한다.
법치주의는 다른 말로 ‘법에 의한 지배’다. 우리나라에서 법치주의를 엄격한 법집행으로 착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지만, 이는 오해에 따른 것이다.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이 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공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것이다.
블루헤븐의 민회가 우리나라의 국회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앞에서 가정한 바 있다. 만약 위 요구안이 받아들여진다면, 블루헤븐의 세금은 황제의 뜻대로가 아니라 '시민들의 뜻'에 따라 매겨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 식의 변화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가 그 대표적인 예다.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잉글랜드의 존(John) 왕이 서명한 대헌장이다.
세금은 법률에서 정해진 바에 따라 부담해야 한다는 이른바 '조세법률주의'의 영어식 표현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이다. 우리말로 흔히 “대표 없이 세금없다.”로 옮긴다. 이 표현은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 때 나온 슬로건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 미국에 부과한 과도한 세금으로 개척민들의 불만이 정점에 다다르면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에게 매겨진 세금이 자신들의 대표가 없는 영국 의회의 일방적 결정에 의한 것이므로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미국 개척민들의 동의 없는 세금에 대한 부당함이 언급되고 있다. “For imposing Taxes on us without our Consent.”
물론 이러한 당돌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영국은 매를 들었지만, 그 결과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