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로키 빙하여행은 없다*
너무 설레서 토할 것 같다던 딸은
설렘만 잔뜩 토해놓고 잘도 잔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듯, 반짝~ 하고 눈이 떠진 7월 1일 ‘캐나다 데이’ 아침.
로키, Good morning! ~
그 어느 때보다 떨리고 기대되는 날이다. 딸과 나는 로키 산꼭대기에 위치한 100개가 넘는 빙하를 보고 마실 것에 신이 났다. 고대로부터, 먼 과거로부터의 전설 같은 것도 호수에, 협곡에, 폭포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빙하 위를 걸으며 생각해 볼 심산이었다.
• 일정: ‘캐나디안 로키’ 여행
BC 주와 앨버트주의 경계, 재스퍼(Jasper)에서 아이스필드 파크웨이(Ice Field Parkway)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밴프(Banff)까지.
딸의 일기장에 적혀있는 대로 ‘캐나닼 아이스필들’에는 짱짱한 이름들이 로키를 수놓고 있다. 캐나다 로키 최고봉 롭슨 Mt. 로키의 진주 재스퍼, 세계 10대 절경 중 하나인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특히 이 엄청난 보물들을 품고 있는 앨버타주는 엄청난 ‘부자동네’라 7%의 주세도 받지 않는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지하자원의 보고이며 ‘유황산’인 설퍼산에는 온천이 있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눈 덮인 산처럼 반짝이며 위용 자랑하는 희한한 산들은 알고 보니 ‘석회산’이다.
이래저래 부자는 돈을 벌게 되어 있나 보다.
앨버타주로 넘어오면서 경치는 또 달라졌다. 1시간도 잃어버렸다.**로키의 깊숙한 심장부, 은밀한 공간으로 점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도로를 넘어 한 발짝만 산속으로 발을 디디면 발목을 확~ 끌어당길 것 같은 유혹의 손이 구름이 되어, 안개가 되어 로키의 산 봉우리를 간질이고 다녔다. 운해(雲海)다.
구름이 산 봉우리를 배회하고
구름 그늘이 산을 따라다녔다.
바람과 물살이 만들어 낸 조각품, 애써배스카(Athabasca Falls) 협곡을 보고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창 밖 경치에 넋을 놓고 있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그런데 버스는 식당이 아닌 아이스필드 어느 길가에 정차했다. 로키의 공기를 반찬 삼아 식사를 즐기라고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한다.
가이드분의 빛나는 기획과 연출이다.
누가 이런 자연의 식탁과 황홀한 배경의
주방을 연출할 수 있을까?
사물과 형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물며 페이토 호수의 색은 무슨 수를 써도 표현할 길이 없는 빛임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페이토 호수는 봄에는 깊은 청록색을 띠고 여름에는 초록빛이 옅어지고 푸른빛이 짙어진다.
호수 빛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이는 빙하 때문이다.
빙하가 녹아 호수로 흘러들면서 함께 섞여 들어온 암석 가루가 가시광선의 푸른색만 반사해서인데 햇빛이 강할수록 울트라 마린이나 시룰리안블루의 푸른빛이 강해진다.
우리가 찾았을 때는 7월 1일이었지만 구름이 많고 약간 흐린 날의 오후 시간대여서 호수 빛은 에메랄드 그린색 혹은 스카라브 그린색쯤 되려나 싶다.
변덕쟁이 요정이 휘리릭~ 심술을 잔뜩 부리고 숨어버린 걸까? 페이토 호수를 떠날 때까지 선명한 하늘빛 물빛을 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먼 설산만 바라보았다.
아, 저곳은 어쩌면 세상의 끝이 아닐까?
아릿해졌다
오랜 기다림의 끝은 의외로 덤덤했다. 설렘에 겨워 지나치게 흥분하는 바람에 제 풀에 지쳐버린 거다.
그러나 우리는 밴프 국립공원의 한 자락에 진입했고, 빙하와 만났다. 구름빛도 하얗고 눈빛도 하얗다.
눈 앞에는 산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빙하의 빙판이 펼쳐져 있고 1.5M 바퀴가 6개나 장착돼 있는 설상차는 35도 경사지역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빙하와의 첫만남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더욱 견고해졌을 새하얀 빙하가 절벽을 이루고 골골이 패인 실낱 같은 줄기에서 수정 같은 빙하수가 햇빛에 부서지는 상상을 하였었다. 빙하와 나만 오롯이 마주하고 있는 신비한 장면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빙하가 녹으며 나타나는 돌, 자갈, 모래 등이 운반되고 퇴적되어 생기는 ‘모레인(Morain)’은 산처럼 쌓여 있고 빙하는 계속 녹아 시냇물처럼 흘러내린다. 이상고온이 계속되고 있다지만 이렇게 빨리 녹다가는 30년~50년 안에 빙하를 못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이스필드에서 보게 된 ‘까마귀 발 빙하’도 발톱 부분이 녹아 없어져 전혀 까마귀 발처럼 보이지 않았다. 빙하도 가까이 보니 순백은 아니다. 잿빛이다.
빙하수를 빈 생수통에 담아 옛날을 마시듯 마셔보았다. 엄청 시원했지만 단맛은 나지 않았다. 실제로 보게 된 기후변화에 따른 심각한 자연의 모습에 빙하수 맛도 반감된 느낌이었다.
먼 옛날의 전설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먼 옛날이 되어야 할 지금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입 안이 괜스레 까슬해졌다.
두 번째 로키 빙하여행은 없을 수도 있다
로키의 하이라이트, 레이크 루이스는 톰 윌슨에 의해 애메럴드 호수로 불렸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딸, 루이즈 공주가 방문한 이후 루이즈 호수로 바꾸었다. 공주 이름을 따와서일까? 이 호수는 빅토리아 빙하와 산 앞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어 마냥 잔잔하다. 공주의 드레스 마냥 하늘하늘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 호수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다. 세상 고민 한번 안 하고 산 사람들 같다. 평화주의자의 얼굴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우리도 평화주의자가 되어 호숫가에 앉아도 보고 꽃향기도 맡으며 한참을 걸어 다녔다.
나란히 앉아 있는 백발의 노년이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내가 중년을 넘어가고 있는 중인가 한다.
여기 이 호수에 있으면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한가롭게 이어지다 어느 순간 멈춰버릴 것만 같다.
딱 요정도의 햇살과 한가로움이면 좋겠다.
밴프는 작은 마을이지만 로키를 찾는 산악인이나 관광객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쉼터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그다지 시끄러울 리 없는 마을인데, 이 날은 캐나다 데이라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게다가 9시가 되어도 밝은 백야이니,
오늘 이 마을은 잠들지 않을 예정이다.
거리를 찬찬히 보며 걸어도 1시간 남짓이면 마을을 다 돌아볼 수 있으나 2시간 여에 걸쳐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마을이 아기자기 예쁘기 때문이다. 고층건물이 없어서 눈도 너무 자유롭다.
오늘 같은 날, 이런 분위기에는 컨츄리 송이 흘러나오는 오래된 펍 창가 자리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오징어 다리라도 뜯어야 하는데... 딸에게 애걸했다. 너 보호 차원에서 여행 중 술은 안 먹겠다 했지만 그러다 내가 속 타 죽을 지경이다.
이런 날 안 마시면 큰일 난다, 죄짓는 거다.
약속은 깨는 맛이 환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했다.
딱, 식스팩 하나만!
맥주 창고를 털어왔다. 내가 캐나다에서 처음 산 맥주는 Beck’s다.
꿀꺽꿀꺽... 아, 이 맛에 산다.
Rose Diary
밴프가 너무 좋아!
캐나다 데이에 맞춰 레이크 루이스 호수에 있었고 밴프 시내를 돌아다니다니...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아름다운 호수를 보며 호텔에서 나누어주는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먹은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꽃향기가 났고 사람들은 웃으며 행복해했다. 호수 주변을 걸어 다녔다.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밴프는 꺄~~~ 너무 예쁘고 귀여운 마을이다.
사람들은 신이 나 있었고 날은 밝았다. 9시가 됐는데도 아직 밝았다. 백야다.
돌아다니고 사진 찍고 군것질도 했다.
특히, 마운틴 수제 초콜릿 집은 헐~ 대박! 너무너무 예쁘잖아. 다 사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제법 비싸다.
그러나 진짜 사과 하나에 초콜릿으로 코팅을 하고 그 위에 토핑을 얹은 초콜릿 애플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너무 예쁘잖아~
엄마도 술이 고프다 하여 맥주를 샀다. 초콜릿으로 안주를 하셨다. 살찌는데...
오늘이 가는 게 아쉽다. 꼭 다시 와야지!
*) 타일러의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책에서 착안해 부제목을 붙여보았다.
**)위도 15도마다 1시간의 시차가 나는데 BC주가 앨버타주 보다 1시간이 빠르다. 그래서 앨버타주를 넘어오며 1시간을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