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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Jul 31. 2023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우울증 치료. 약을 끊어볼까?

’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 요한 하리‘를 읽고.


우울증 약을 먹은 지 어느덧 456일이 되었다. 평범한 (?) 사람들이 그러하듯 좋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들이 반복이 되고 , 울고 웃고 화내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는다. 거대한 목표는 아니지만 지금 것 썼던 글들을 모아 퇴고를 거쳐 독립출판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 인생의 목표가 생겨서 성실히 살아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번 생엔 큰 욕심 없다.라는 마음에 어느덧 욕심이 생겨간다.


 최근에는 못해도 일주일에 3번은 등산을 다니고 있다. 이게 또 얼마나 큰 일이냐면 , 고등학교 때 등산을 하며 쉬어가는 타임에 김밥을 너무 급하게 먹었는지 어쨌는지 하산을 하며 무지개분수토를 한 이후로는 산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래도 육아력은 체력이 8할이라는 생각에 열심을 내어 보았다. 2

갈까? 말까? 할까? 말까? 하는 ’ 선택‘ 아닌 ’ 의무‘로서의 등산. 생각보다 등산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밥 먹는 양이 많아졌고 해 가지고 노곤해지는 저녁이 되면 자연리듬에 맞춰 잠이 쏟아진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을 보내고 나니 눈에 보이도록 변화가 찾아왔나 보다. 남편이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좋은 변화인 것 같다고 칭찬을 해줬다. 입에 파리가 오백마리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쩌억 벌리며 ‘뭐 좀 많이 먹기는 하지’라는 말도 덧붙이기는 했다. 근육돼지의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닐지 염려가 되지만 몸 튼튼 마음 튼튼! 튼튼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종종 가라앉는 날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겨’ 낸다는 생각은 저 멀리 보내버렸다. 그저 더 가라앉지 않도록 방어를 할 뿐이다. 수면시간을 더욱 넉넉하게 확보를 한다던지 , 더운 주방에서 밥을 하는 대신 피자를 시켜 먹는다던지 (필자가 피자를 엄청 좋아해서 핑곗거리만 생기면 파파존스를 검색한다) , 남편이 있는 날엔 에라 모르겠다의 심정으로 그냥 방에 누워버린다던지 , 무한도전 레전드영상을 찾아보던지 뭐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내일은 나아지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오늘은 견뎌낸다. 그러다 보니 그럭저럭 하루들이 이어져간다. 숨 막히는 우울감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덜 신나고 평소보다 예민하고  평소보다 가라앉는 날이 있을 뿐.  나 우울증 심해진 거 아니야?라는 찝찝한 생각은 개나 주고 , 사람이 언제나 좋을 순 없지 않나? 밥 잘 먹고 아이들은 아프지 않고 남편은 출근해서도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내 생사(?)를 확인해 주니 이만하면 좋은데?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도록 노력을 한다.


솔직하게 우울증에서 날 건져낸 건 약물의 힘이었다. 아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활력 돋게 활동을 시작하고 머릿속의 뿌연 안개를 걷어낸 건 분명 약물의 힘이었다. 치료 초반에 약이 날 구해줬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매일 빼먹지 않고 456일을 먹었다. 약을 계속 먹어야 뇌 호르몬이 일정한 농도를 유지하게 되고 다시 우울함에 처박히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젠 그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슬금슬금 들었다. 최근 들어 가장 컨디션이 개똥 같았던 날을 회상해 보았다. 약이 똑 떨어져서 병원을 가던 날이었는데 , 둘째 주 토요일이라 문을 닫던 날이었고 약을 먹지 못한 채 아이들과 사계절 썰매장을 갔었다. 옆에서 날 지켜보던 남편은 월요일날 꼭 병원을 가자며 날 다독이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애가 좀 이상해(?) 보였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약을 먹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 생각을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날은 폭염이었고 썰매장엔 물을 연신 뿌려 한증막  같은 더위가 나를 삼켰으며 , 아이가 먹고 싶다고 졸라서 먹었던 돈까스가 소화가 되지 않아 토할 것 같았다. 충분히 짜증날만 한 상황 아닌가? 난 더위에 약하고 기름진 음식에 약하며 사람 많은 데가 싫… 이렇게 쓰다 보니까 생각보다 정적인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여하튼 약을 안 먹어서 그랬다기보다는 , 날이 더워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던 거 아닌가?


생각이 겹겹으로 쌓이던 어느 날 요한 하리라는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 최근 출판한 그의 저서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다가 자료수집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은 것 같아 다른 책들도 찾아보니 우울증 관련 책도 있어서 냉큼 읽어봤다. 책의 시작은 이러했다. 작가님은 18살 처음으로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고 했다. 31살이 된 그는 여전히도 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우울했다.

나는 우울증이 뇌의 오작동이며, 세로토닌 부족이나 다른 정신적 하드웨어 결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나는 뇌의 화학반응을 고쳐줄 약물이 그 답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합리적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평생 동안 나를 지배했다.
(…)
화학적 도움의 거품이 꺼지고 나면 언제나 불행이 되돌아왔다. 나는 다시 같은 생각에 갇히기 시작했다. 인생은 무의미하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그저 시간낭비라고. 불안은 끝도 없이 되풀이 됐다. 내가 이해하고 싶었던 첫 번째 미스터리는 , ‘왜 항우울제를 먹어도 여전히 우울한가?’였다.
(…)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두 번째 미스터리는 이것이다. 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지고, 심각한 불안을 느끼는가? 대체 무엇이 바뀌었기에?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 번째 미스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 화학물질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우울과 불안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 요한 하리]


그렇게 그는 우울증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우울증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저명한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심각한 수준의 우울과 불안을 겪은 후 회복한 사람들을 만나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단절’이라고 말했다. 의미 있는 일로부터의 단절, 타인과의 단절, 자연과의 단절, 가치와의 단절, 지위와 존중으로부터의 단절, 안정된 미래로부터의 단절. 그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노력 덕분에 나는 아이스커피를 들이켜가며 한가로이 집에 앉아 우울증의 정의와 치료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넙죽넙죽 받아먹을 수 있었다. 우울증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을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내 우울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즉각적인 처방을 원했다. 나는 혼자서, 신속히 추구할 수 있는 방식들이 필요했다. 내 기분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혼자서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뭔가를 원했다. 약을 원했고 그 약이 효과가 없으면 약만큼이나 신속한 효과를 발휘하는 뭔가를 원했다. 우울과 불안에 관한 책을 집어든 독자 여러분도 아마 나와 같은 것을 원하리라.

내 지인은 내가 잘못된 약을 복용하고 있다면서, “대신 자낙스를 한 번 먹어봐”라고 했다. 솔깃했다.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다. 어떻게 내가 지금껏 묘사해 온 모든 고통과 절망에 대한 해결책이 신경안정제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냥 약을 먹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방법, 아무 노력 없이 혼자 실행할 수 있는 방법, 매일 아침 20초를 투자해 약을 먹기만 하면 예전처럼 살 수 있는 그런 방법, 그러나 신속한 개인적 해결책을 찾는 것은 함정이다.


아이 둘을 키워내는 건 생각 밖으로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 앉을 수도 없는 어린 아가와 엄마 손이 필요한 미취학 아이, 이 두 생명을 사랑으로 품고 키워내려면 당장 나의 우울감이 해소되었어야만 했다. ‘즉각’적이며 ‘혼자’서 ‘신속’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약은 내게 동아줄이 되어주었다. 복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세상이 샤랄라 하게 바뀌었다. 당연히 그 이후로 456일을 맹신(?) 아닌 맹신을 해가며 약을 먹었다. 사실 그때는 약을 복용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기는 했다. 나의 담당 선생님께 우울증의 원인을 여쭈었을 때 생물학적 원인, 심리적 원인, 사회적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했고 맹수봉 씨가 약을 복용하고 나서 나아지는 기분을 경험을 했으니 세로토닌 농도에 의한 것일 확률이 높겠다는 이야기를 건네셨다. 그랬기 때문에 나머지 2가지의 원인은 뒤로 밀어버리고 ‘뇌 탓’을 해가며 약을 먹었으나 책에 나온 다른 전문가는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문제는 당신의 ‘뇌’가 아니다. 당신의 고통이다.”



제약회사들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자사의 실험결과들을 숨겨왔었다. 예를 들어 프로작에 대한 한 실험에서 그들은 245명의 환자에게 약을 투여했지만, 오직 27명에 대한 결과만이 공개됐다. 약이 효과를 발휘한 것처럼 보이는 27명이었다.
(…)
홍보를 위한 필터를 거치지 않은 진짜 데이터에서 어빙이 발견한 것은 , 항우울제가 분명히 해밀턴 점수(우울증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를 낮아지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항우울제는 우울한 사람들의 기분을 확실히 더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점수로는 1.8 정도였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났을 때와 비교했을 때, 그건 고작 3분의 1 수준의 점수 변화일 뿐이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항우울제가 적어도 보통 환자들에게는 거의 의미 있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그와 대조적으로 약들이 가진 부작용은 매우 실질적이었다. 약 때문에 사람들은 살이 찌거나 성기능 장애를 겪어나 땀을 많이 흘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타입의 항우울제인 SSRI는 특히나 성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심지어 치료를 요하는 성기능 장애의 75%가 SSRI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어요.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화학적 항우울제가 자살위험성을 높여요. 폭력적인 범죄행위의 위험성을 높인다는 새로운 연구결과도 스웨덴에서 나왔죠.

일단 항우울제의 효과를 보기 시작하면 이를 중단하기 어려워진다. 약 20%의 사람들이 심각한 금단증상을 경험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플라세보 효과를 얻고 싶다면, 적어도 안전한 약을 쓰도록 하세요. 세인트존스워트(항우울 작용을 한다고 알려진 여러해살이 풀) 같은 약초를 처방할 수도 있어요. 충분한 플라세보 효과를 얻으면서도, 앞서 말한 문제점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요. 물론 제약회사들은 세인트존스워트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이 약초를 통해 그다지 많은 이윤을 내지는 못할 것이지만 말이다.

(…)

그는 내게 자신이 본 증거들은 항우울제를 6~20주까지 처방했을 경우 뒷받침한다고 강조했다. ”장기간 약을 복용할수록 증거가 희박해지고 제가 논쟁에 기여하는 바도 적어져요. 그 누구도 14년 동안 이 약을 복용했을 때의 득과 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요 “ 나는 불안해졌다. 이미 나는 그에게 내가 거의 그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약을 먹어 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 불안을 눈치챈 듯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우리는 꽤 운이 좋았어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약을 끊고 제대로 행동하고 있으니까요 “


책은 지속해서 약물의 이면을 알려줬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아직도 병원에서 일하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약처방을 받아오면 약전을 먼저 찾아보곤 하는데 다른 것들보다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들의 부작용에 대한 설명들이 어마어마했지만 못 본척하는 걸 선택했었다. 당장 지금 ‘괜찮은’ 기분에 취해 보고도 못 본 척.


스타 D 프로젝트.
평범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서 자신이 우울하다고 말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여러 옵션을 설명해 주고 환자가 원한다면 항우울제를 처방해 준다. 환자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하고, 이 시점에서 임상과학자들이 환자를 모니터링하기 시작한다. 항우울제가 환자에게 듣지 않으면 다른 약을 준다. 그 약도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약을 준다. 그리고 효과가 있는 약을 먹게 될 때까지 이과정을 반복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그리고 항우울제를 처방받은 사람들 중 다수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한 종류 이상의 약물이나 복용법을 시도해 본다.

이 시험을 통해 약들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약 67%의 환자들이 기분이 나아졌다고 느꼈다. 내가 약을 바꾸는 첫 달마다 느꼈듯이 말이다.

그러나 1년 이내 환자의 절반은 다시 완전히 우울해졌다. 약을 꾸준히 복용한 환자들 중 겨우 3분의 1만이 우울증으로부터 완벽하게 회복했다. (심지어 이 사실조차 약의 효과를 부풀린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약 없이도 자연적으로 치유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타-D 임상시험 결과를 읽으면서 내가 정상임을 깨달았다. 내 경험은 매우 교과서적이었다. 나만 특이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항우울제 복용의 전형적인 단계를 경험한 것뿐이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고도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비율은 65~80%로 나타났다.

일부 명망 있는 과학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약물들의 실제 화학적 효과 덕분에 소수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소수의 우울증 및 불안증 환자에게는 화학적 항우울제가 부분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겠다. 어느 누구에게든 해결책이 된다면 나 역시 그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항우울제가 도움이 된다고 느끼고, 그 이점이 부작용보다 크다면 계속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들 앞에서, 대다수의 우울증 및 불안증 환자에게 항우울제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나는 이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처음 약을 복용하면서 정말로 효과가 있었고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우울감을 느끼는 날들 찾아왔다. 그저 저자와 또 다른 사람들처럼 나 또한 항우울제 복용의 전형적인 단계를 경험한 것뿐이었던 것 같다. 저자는 14년을 했을 뿐이고 나는 456일을 했을 뿐이고. 그 차이랄까. 그럼 난 어쩌지. 약 계속 먹어말어. 거듭 고민이 되는 날들이었다.

운동을 하고 폭식은 사라지고 더 나은 식이생활을 이어가는데도 살이 꾸준히 찌고 있다는 건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한데. 나의 선생님은 약을 먹다가 그냥 끊어버리면 그 다음번의 우울증은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다며 지속적인 복용을 권고하셨다. 그런데 지속적이라고 함은 언제까지가 지속적인 것일까. 골치가 아프다.


아 어쩌라고 오. 책의 저자 요한 하리는 우울증의 원인을 ‘단절’에서 찾았다. 그 단절들이 현대인들에게 유행병처럼 번지는 우울증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했다. 그럼 여기에 적힌 내용들을 반대로 한다면 우울감을 낮추거나 다음에 올 수 있는 우울증을 좀 더 순살처럼 연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책에 나온 단절의 의미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일의 단절이 우울증을 야기한다고 한다. 내가 경단녀가 된 지도 어언 7년 차인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일의 단절로부터 우울증이 왔다는 건 좀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포인트는 지위가 아닌 ‘주도권’이라고 한다.

일에 대한 재량권을 더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같은 지위에서 같은 수준의 급여를 받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 (업무 주도권이 적은 사람) 보다 우울해지거나 심각한 정서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최악의 스트레스는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감을 견디는 것이 아니다.
단조롭고 지루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일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 최악의 스트레스였다.

“사람들은 매일 출근하고 그곳에서 조금씩 죽어가요. 왜냐하면 그 일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사람다운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죠”


육아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확실하지만 , 주도권은 거의 없다. 웃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내가 그나마 가질 수 있는 주도권은 오늘의 식사 메뉴정도? 그러나 그 마저도 드시지 않겠노라 극대노를 하시면 그것마저 꽝이 돼버린다. 아 퇴근 없는 인생이여.


일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기로 큰 결심을 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번 식당문을 열기로 했다. 아가 손님들께서 배가 고프지 않겠다며 아침을 안 먹다가도 애매한 시간에 와서 배가 고프다고 이야기를 종종 하고는 한다. 그럼 각성한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배가 고프구나. 하지만 지금은 식당문을 닫았어. 이따 점심시간에 다시 오렴” 오호호호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울면서 돌아가는 아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하루종일 밥을 할 수는 없다. 더불어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을 잘 다듬어서 독립출판을 하기로 했다.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시켜가다 보니 쏠쏠한 재미들이 숨어있어서 삶에 작은 기쁨들이 되어준다. 내 삶에 주도권을 이어가 보기로 한다.


두 번째로는 타인과의 단절을 이야기한다.


외로움을 느낀다고 기록했을 때 코르티솔 농도(스트레스 호르몬)는 절대적으로 치솟았다.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일을 겪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연구는 극도의 외로움이 신체적 공격을 경험할 때만큼 큰 스트레스를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깊은 외로움은 낯선 이에게 주먹으로 한 대 맞은 것만큼이나 큰 스트레스를 주었다.

먼저 우울해지고 난 후 외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은 어쩌면 그 반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외로움이 당신을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 5년간 조사된 데이터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우, 외로움은 우울증에 선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 그 후에 절망감과 깊은 슬픔, 우울함이 뒤 따라왔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는 외로움이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정도의 우울과 불안을 야기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음의 독방>
오늘날 우리가 집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4개의 벽과 핵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전의 인류에게 집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집은 공동체였다. 우리를 둘러싼 촘촘한 인간들의 망, 바로 무리였다. 그러나 이제 무리는 거의 사라졌다. 집에 대한 감각은 너무나도 멀리, 그리고 너무나도 빠르게 사그라져서 이제는 더 이상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있을 때조차 향수병을 앓게 된 것이다.


둘째를 낳고 나는 벽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쌓여가는 카톡이 아닌 나의 벽을 무너뜨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날들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과 덩그러니 남겨져있을 땐 ‘함께’라고 하기엔 나의 아이들은 너무나 어렸고 나는 지쳐있었다. 지쳐갈수록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들이 더 커졌다. 이렇게 이쁜 내 새끼들과 있으면서 이런 마음이 일렁이는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나는 더더욱이 혼자가 되는 것을 택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었다. 나 또한 집에 있을 때조차 향수병을 앓게 되었던 것 같다. 종국엔 우울증을 진단을 받았는데  그때의 나는 그저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다. 실질적인 도움. 잠을 자고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아주 단순하지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도움이 절실했던 것 같다.  외로웠다.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육체적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자신이 공유하지 못한다는 느낌이죠. “
주면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설사 남편이나 아내, 가족, 혹은 직장 동료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사람, 이상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의 ‘상호 간 협력과 보호’가 필요하다.

외로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타인이나 집단과 뭔가를 공유한다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단, 그것이 양쪽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 안에 함께 속하되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의미와 가치를 가져야 한다.


첫째를 낳고 7-8개월 무렵부터 교회 공동체모임에 참여했는데 그곳에 계신 분들은 아이랑 놀아주시기도 하고 집에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태워다 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엔 문을 열면 김밥이 놓인 날도 있었다. 햄버거를 직접 만드셨는데 양이 많다며 나눠먹자고 직접 우리 집에 가져다주셨던 분도 계셨고 밥 편히 먹으라며 밥 먹는 내내 아이를 안고 계셨던 분도 계셨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뜨끈하다.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그러하듯 모임에 열심히 나가다 보면 어느 날인가 그 모임을 둘로 나눠 새로운 모임을 만들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모임장의 제안을 받고. 큰 아이가 두 돌이 되어갈 무렵으로 기억한다. 교회에서는 제안이 아닌 지속적인 ‘푸시’가 들어왔다. 그때의 나는 안정적인 모임이 나뉘는 것도 싫었고 내가 새로운 모임의 모임장이 되는 건 더더욱 싫었다. 힘들면 힘든 데로 하면 되고 ‘기도’와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이야기들만 맴돌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 해보니 두 돌이 되기도 전의 아이를 독박으로 키워내고 있던 엄마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둘째 임신을 하고 여러 일들이 생겨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아이가 둘이 되고 보니 공동체가 더욱 절실히 필요로 했다. ‘아이 키워봐서 알아요 너무 힘들죠. 너무 힘들 때를 지나고 있어요’라는 말도 고마웠지만 , 함께 밥을 먹고 그 힘듦을 나눌 사람들이 절실했다.


너무 유명해진 말 ‘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그 말. 현대 사회에서 더더욱이 출산 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보면 교회공동체 또한 건강함을 잃어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비치어 본다. 속상할 따름이다.


책의 저자는 내게 묻는다. 주치의를 찾아갔을 때 “단절”이라고 진단받았다면 무엇이 달라졌겠냐며.  



공동체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도록 함께 힘을 실어주었다.
(…)
이건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주로 이곳,
우리 인생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정말 어렵다. 테스형 ~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 내가 원한다고 뚝딱뚝딱 공동체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지 않고 문을 열고 한걸음 내딛기로 했다. 혼자 우는 것보다 둘이 우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 같이 울다가 상대방이 흘리는 콧물을 보고선도 웃음이 날 수 있으니 육아로 힘든 이들을 찾아 연락을 하고 집으로 종종 초대를 했다. 같이 밥을 먹고 넋을 놓고 앉아있기도 했다. 그것뿐인데 한결 나은 하루가 되었다. 실현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제주도 이주를 알아보는 중이다. 돈이 많아서 그리고 여유가 있어서 가는 게 아니고 ‘연대’하고 싶어서 한걸음을 내딛는다. 방한켠을 내어주고 육아의 덫에 걸린 이들과 함께 울고 웃고 싶어서 또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지속가능한 해결책보다 나는 지금 당장의 해결책이 시급했었다.  쉬운 답을 원했다. 즉각적으로 해결되기를 원했다. 출산과 육아가 너무 힘들었어서 지금 당장 나아지기를 원했었다.


책의 저자 요한 하리 또한 이런 이야기를 고백했다.

나는 이 책을 작업하면서 내 우울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즉각 처방을 원했다. 나는 혼자서, 신속히 추구할 수 있는 방식들이 필요했다. 개인적인 방법, 아무 노력 없이 혼자 실행할 수 있는 방법. 매일 아침 20초를 투자해 약을 먹기만 하면 예전처럼 살 수 있는 그런 방법. 그러나 신속한 방법을 찾는 것은 함정이다.


내가 함정에 빠졌구나. 그랬구나. 그래도 약의 도움을 적절히 받았으니 이젠 남은 인생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 보기로 한다. 책은 내게 다른 질문을 다시 던져왔다.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라는 질문이 아닌
“당신에겐 무슨 문제가 중요하죠?”


질문을 달리하니 답변이 달라진다.

 ‘문제’를 물으니 ‘우울증‘이 문제입니다.라는 답을 하게 되고 그럼 저 우울증 새끼를 조져버려야지 -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무슨 문제가 중요하냐 물으니 가족들과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는 답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울증은 나를 돌아볼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좀 많이 힘들고 아프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덕분에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그만 밑 빠진 독에 물을 그만 붓고 , 깨어진 독을 붙여갈 준비를 해내야겠다. 이제 약은 그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


단절된 것들을 이어갈 시간이다.



*** 단약은 의사와 상의를 꼭 거쳐야 합니다.

*** 이후 단약을 진행했고 , 이 글을 적는 지금은 단약 1달째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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