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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Feb 23. 2023

작은 행복 찾기 연습

우울증치료330일


나의 브런치 <우울한 나도 다정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책에게 물었다>에서 now&here ‘지금’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야하는 것이 우울증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언급했었다. 커피의 향이 좋고 , 갓 구운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행복 같은 것들 말이다.


감정이 무덤덤해지고 약간의 기분처짐이 있어 달력을 확인하니 정확히 생리 9일전이었다.


[나의 생리호르몬에 의한 기분주기는 생리 9일에서 3일 전까지는 우울감이 짙어지고 생리 2일전부터 생리 당일까지는 불면증이 심해진다.거의 기계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을 우울증을 치료하며 감정일기를 적으며 알게되었다.]


‘노잼 시기’라는 말이 있습니다.뭘 해도 재미없고 의욕도 떨어지고 모든게 귀찮아지는 시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시기에는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가 지루하고 의미 없게 느껴져요. (중략) 이렇듯 가라앉은 기분은 현대인에게 낯선 감정이 아닙니다. 우울증처럼 적극적인 우울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 그저 모든 게 밋밋한 상태라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도 쉽지 않고, 이에 대한 조언도 좀처럼 와닿지 않습니다.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 황인환>


생리전에 찾아오는 이 기분을 뭐라 말할 방법이 없었는데 ‘노잼기간’이라는 말이 딱 맞는 표현을 보자마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같은 깊은 우울은 아닌데 그렇다고 뭔가 막 신나지도 않는 이상한 기분. 이런 정확한 몸뚱이 같으니라고.


이런 감정들은 보통 ‘아침’에 아이들을 케어할 때 너무나 성가시고 분노게이지를 금새 올리는데 용이하다.  ‘노잼시기에 분노 한 스푼’이랄까.


생각보다 계획형인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 해야할 일들이 머릿속에 차르륵 펼쳐지면서 몇시무렵에 내가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가 계산이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씻겨 먹이고 등원을 시켜야 하는 아침이면 유난히도 머릿속이 분주해서 작은 것에 더 썽을 내곤 하는데 거기에 호르몬까지 요동치면.. 어휴..


아침이라고 하기엔 조금 약소하지만 어서 과일이랑 식빵한조각을 챙겨드셔야 씻고 나갈 시간이 될텐데 , 아이는 엄마의 시커먼 속은 알지도 못한채 몰입해서 가위질을 하고 계신다. 어서 씻고 나와서 옷을 입어야 하는데 똥을 싸러가신다고.. 응가 다했다고 해서 뒷처리 도와주러 가면 “헤헤 아직 다 안했지롱-” 장난을 치고 계신다. 그러길 두세번. 아이 도시락 가방도 챙겨야 하고 , 오전에 시리얼이 나온다고 해서 아토피 대체 간식도 챙겨야 한다. 작은 친구 또한 아침을 대충 먹이고 손이랑 얼굴을 씻겨서 옷입히고 양말을 신켜 큰 친구가 나갈 때 같이 데리고 나가야하는데 , 이 친구도 시커먼 엄마의 속은 모른채 엄마랑 잡기놀이를 하고 계신다. 심지어 잡히기 직전 기저귀에 응가까지 하신다.


‘하 해야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씨름할 시간이 없다 아가들아..’


그렇게 후다닥 아침을 보내고 나면 제 정신을 차릴 때 까지 오랜시간이 걸린다. 참으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몸뚱이가 아닐 수 없다. 우리집 작은 친구가 낮잠을 자는 사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무엇보다 생각만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좀처럼 와닿지 않고 막막함만 더하는 철학적 주제보다도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현재의 기분에 집중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감정이나 기분은 많은 순간 우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낚아채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를들어 여러분이 길을 걷다 타이밍이 딱 맞게 신호등 불이 바뀌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대수롭지 않게 길을 건넜다면 지하철을 타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대부분의 일상처럼 금방 잊힐 것입니다. 하지만, ‘와, 날도 추운데 다행이다. 덕분에 바로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네’라고 생각한다면 소소한 행운으로 기억될 수 있을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여러분의 일상에 정말 어떠한 재미도, 사소한 행복도 없었나요?

기분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실제로 그럴 만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기 보다는, 꼭 필요하지 않기에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을 수 있습니다. 일상 곳곳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행복을 제대로 봐주지 않으면 뇌는 그냥 삭제해버립니다. (중략) 생활에 걸리적거리니까 뇌가 삭제해 버린 것입니다. 일상의 많은 행복한 순간도 이와 비슷하게, 실용적이지 않고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고 흘려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손 놓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복을 찾아내서 그것을 ‘행복하다’고 인지하는 습관을 키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금 해야 하는 과제에 집중하느라 많은 순간 기쁨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분을 주의 깊게 살피고 구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 황인환>


학습 중에 가장 최고는 역시 반복학습이라 했는가.

당장 내 눈앞에 해치워야 하는 과제들 때문에 작은 기쁨들을 눈앞에서 놓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노잼시기라며 분노에 휩싸이는 나 스스로를 너무 합리화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대망의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머릿속에는 일단 몰아치듯 해야 하는 일들이 생각이 나지만 무력한 몸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해 그 사이에서 버벅거리는 내가 있었다. 그럼에도 심호흡을 하며 어제 읽었던 책을 다시한번 되뇌인다.


사과를 깎으며 유난히도 붉은 사과가 탐스러워보여 기뻤다.

아이들에게 주기전에 한조각을 입에 쏙 넣어봤더니 진한 사과향이 입에서 퍼졌다.



어제 들깨강정을 만들었는데 , 설탕물 농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자기들 끼리 붙지 못하고 낱알이 떨어지는 걸 숟가락으로 떠서 그릇에 옮기며 그래도 아침에 먹을 들깨가 고소하고 달콤함에 기뻤다.


옷을 입어야 하는 시간인데 팬티만 입고 날뛰면서 춤을 추고 있는 아이를 한눈에 가득 담자니 원숭이 같아 귀여워서 기뻤고


양치안한다며 울던 작은 아이가 큰맘을 먹었는지

선글라스까지 쓰고 와서는 비장하게 칫솔질을 하는 모습이 기가 막혀서 기뻤다.



병원에 가는 날이라 더 바쁘고 정신 없던 아침이었는데 , 그 와중에 모카포트에 담고 있는 원두의 냄새가 너무 좋아서 황홀했던 아침이었다.

장을보러 자전거를 타고 나왔다가 만난 볕이 좋아 눈이 부셨고 (물론 춥기도 엄청 추웠지만), 장보면서 돌아오던 길에 들렸던 단골가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누렸던 시간이 다정해서 기뻤다. 물론 약 15분의 평화였지만.



강박적으로 시간을 따져가며 일과들을 해치우는 집념의 성격이 바로 변하기는 어렵겠지만 , 그럼에도 ‘해야하는 것’들에서부터 시선을 돌려 지금 내 눈앞의 것에 감탄하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여러가지 감탄사들을 직접 해봤는데 너무 낯간지러워서 바로 그만두었고 딱 하나 자리잡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엄지손을 치켜들며 “이야-“ 라고 외치는 것인데 ’이‘에 강세를 넣고 ’야‘를 길게 빼주는 것이 포인트다. 칫솔을 입에만 물었을 뿐인데 ”이야-“양치 시작했네 라고 엄지척을 해주면 분노의 양치질을 시작하고 , 양말을 가지고 온 아이에게 ”이야“ 스스로 가져왔네 라고 하면 나는 나대로 아이의 작은 발과 양말이 귀여워서 기쁘고 아이는 칭찬 받은 기분에 기뻐한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것은 관념적인 삶이 아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지금입니다. 삶을 일상의 영역으로 가져오세요. 그리고 그 삶을 이루는 하루하루를 즐거운 기분으로 채워보세요. 우리에게는 괜찮은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 황인환>

조용하고 은밀한 환희의 날들이었다.
흩어져 있는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마음먹기에 따라 더 자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름다움 수집 일기 /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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