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서 읽고 싶은 책이 있듯이 글도 아껴서 쓰고 싶은 것이 있다. 언젠가는 꼭 쓰고 싶었던 글, 그날이 오늘이다.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그 마음 하나로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말 한마디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옥미야! 나랑 교회 같이 가지 않을래?"
어떤 힘에 이끌려서일까? 난 그 이후로 주일을 거의 빼먹지 않고 교회를 다녔다.
고등부에서 모임을 하고, 문학의 밤처럼 교회 행사에 참여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교회를 다닌 지 1년 정도 되어 갈 때 성탄절 행사로 사영리 찬양을 부르게 되었다. 벌써 40년이 지난 그 노래 음률과 가사를 정확히 기억하는 걸 보면 뇌리에 콕 박힐 만큼 의미 있는 행사였던 것 같다.
성탄절 행사 전에 고등부 담당이었던 김진희전도사님이 주신 카드는 지금도 보물처럼 가지고 있다.
- 아름다운 행위를 가진 옥미.
Merry Christmas!
병아리 같이 노란 옷을 입고 무대에 설 옥미를 생각하니 샘의 축제가 자못 기대된다.
아픈 몸으로 교회에 나온 모습, 남몰래 청소하던 모습, 찹쌀떡과 음료를 준비한 정성
모두 예쁜 모습이었다.
1984년은 몹시 바쁘겠구나.
먼 곳에서부터 열심히 나온 옥미에게 하나님께선 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실 거야.
하나님의 축복 속에 깊어가는 이 밤. 춥고 굶주린 이를 위해 두 손 모으는 옥미에게 눈송이 같은 축복을 허락하소서. Amen. 眞-
전도사님의 이 카드는 굳이 알아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행동과 마음을 알아주는 분이 있다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 감동이 더 바른 태도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게 했던 것 같다.
40년이 지난 올 5월에 사랑하는 고수리 작가님에게서 DM을 받았다.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쓰시는 작가님의 글에 내 이야기를 쓰셨다고 했다.
"글에 등장한 학인 누군지 알아보시겠지요. 옥미님께 보내는 선물이에요. 고마워요."
뭉클했다. 다정하고 온유한 사람, 부지런한 사랑이란 표현에, 나 이런 사람이라 자랑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작가님 덕분에 그런 사람이 된 거 같았다.
쉽지 않은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 견딤과 힘겨움이 전부였다면 어찌 살아낼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낭만을 아시는 분이라 당신의 자녀가 피폐한 삶을 살기 원하지 않으셨고, 늘 혼자 참아내기만 하는 거 같아 보여도 동행해 주시는 그분이 계셔서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태도는 훈련이다라는 말에 동의한다. 살아오면서 이불 킥할 만큼 후회스러운 일이 한두 번이겠는가. 그 후회의 반복이 조금은 나아진 태도의 사람을 만들어간다. 신산한 삶이 때로는 사소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큰 문제 앞에 사소한 감정이나 갈등이 들어 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빡빡한 사람이라, 타고 난 성정이 아니란 것은 자명하다. 그래! 삶이, 그리고 그분이 이렇게 이끌어 갔다는 말이 맞다.
나에게 글쓰기 용기를 불어넣어 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친구이자 선생님인 고수리 작가님의 격려가 굳어가는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아주 쪼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게 한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응원과 격려, 알아주는 세심한 마음을 만났는지 떠올리며 새삼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나의 태도가 알아채주는 마음, 작은 사랑으로 전달되었기를, 좌절하고 버거운 삶 앞에 어깨동무하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를...
"더 다정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더 부지런하게 사랑할게요. 사랑하는 고수리 작가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