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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작가 Jan 10. 2022

간호사 국가고시를 앞둔 너에게

2022 간호사 국가고시

2022년 국가고시가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국가고시를 코 앞에 둔 몇 년 전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교 3학년 겨울, 감기처럼 찾아온 우울증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네가 간호사가 되는 것은 작은 기적'이라고 말이다.


3학년까지는 그래도 잘 버티며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3학년 1학기 공부량은 도저히 흡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루 8시간 실습을 하고도 과제 때문에 새벽 3시는 넘어야 잠이 드는 생활을 하며 몸도 마음도 점차 지쳐갔다. 더 힘들었던 것은 실습을 하면서 '간호사 태움'이라던가 극심한 '오버타임'을 보면서부터였다. 내가 만나는 간호사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피곤함이 묻어있었고, 부서 막내 간호사들은 종종 눈물을 터뜨리기 직전 같은 표정이었다. 죽어라 공부를 하고 대학교를 졸업해도, 나를 기다리는 미래는 저런 모습일 것 같아서 암울했다.


이대로는 지금도 앞으로도 행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의 우울의 시작이었다. 학교를 휴학했고 자퇴까지도 아주 조금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자퇴는 잠시 접어두고 일 년의 휴학기간을 보냈다. 휴학기간이 다 끝나우울이 거의 다 나았을 때쯤, 어머니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네가 간호사가 된다면 그건 작은 기적 일거야."


 복학을 하라는 압박도 아니었고, 어떤 동기부여도 조언도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 간호사가 되는 것은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복학했고 여전히 조금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매일 출석은 했지만 공부는 스트레스받지 않을 만큼, 거의 하지 않았다. 조용히 일 년을 보냈고 어느덧 국가고시가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중간, 기말고사는 대부분 서술형인 만큼 좋은 성적은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국시만큼은 도전해보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거의 매주 모의고사를 봤다. 국가고시 실제 커트라인보다 평균 10점 더 높은 성적을 받을 때까지 매주 모의고사에 응시해야 했다. 오히려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전공수업을 듣는 것보다 매주 시험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1~4회 차 모의고사까지는 아무도 합격자가 없었다. 정말 똑똑하고 머리도 좋고 열심히 하는 애들까지도 다 모의고사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편해졌다. 1년 동안의 방황이 이 시험에 줄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았그 뒤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취약과목을 평균에 맞추는 식으로 보완하는 공부를 했고, 오답노트를 포스트잇으로 만들어서 내가 가는 장소마다 붙여놓고 반복해서 읽었다. 나는 놀랍게도 8-9회 차 안에 70% 넘는 문제를 맞혔고 모의고사를 탈출했다. 모의고사는 16,17회 차 까지 이어졌고 그때까지 탈출 못한 사람들은 학과 사무실에 불려 가서 강제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니 국가고시 전 날에는 불안하면서도 조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추운 겨울날 국가고시에 응시했고, 버스 안에서 도시락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험이 끝나고 가채점은 하지 않았다. 붙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괜히  가채점을 하면 더욱 불안할 것 같았다. 기다림 끝에 성적표를 받았다. 230점이 넘는 고득점으로 시험에 붙었고 나는 간호사가 되었다.




간호사가 되고 현실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매일 같이 오버타임을 하고 늘 피곤했고, 태움도 심하게 겪었다. 매일 용기를 내어 출근했지만 돌아가는 길엔 늘 울면서 퇴근했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100번 들면 그때 퇴사하자, 라며 다이어리에 나를 혼냈던 사람들과 내가 했던 숱하게 많은 실수들을 적어봤다. 100번을 다 채우기 전에 나라는 사람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힘든 와중에도 행복할 요소들을 끊임없이 찾아냈고, 1년 차 주제에 스스로 워라밸까지 챙기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지만 예상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신규 간호사로 입사한 병동에서 만으로 1년을 버텨냈다.  20명 중에 나를 제외하고 16명이 퇴사한 신규들의 무덤 같은 곳이었지만 일 년을 버텼던 이유는 성장하고 있고, 성취감을 느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무식할 만큼 미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버티지 않으면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중간에 울며불며 응급 사직을 선택했다면 아마, 후회했을 것 같다.




간호사가 되고 지금까지 '간호사가 된 것은 잘한 일이었을까?' 수없이 많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매 년, 매 순간 그 대답은 달라졌다.  탈임상 후 다른 길을 준비 중인 지금, 나의 대답은 그래도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간호사가 됨으로써 얻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으며, 다른 어디서도 느끼기 힘든 동료애를 경험했다.


국가고시가 끝나고 웨이팅 기간에는 뭘 해야 할지, 입사 후 병원 생활 어떨지 기대와 걱정이 많을 것이다. 특히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병원이 어수선하고 일반 병원에는 간호사 부족 현상이 더 악화되고 있는 만큼 내가 국시를 봤을 때보다도 더욱 고민이 많고 혼란스러울 것 같다.  국가고시를 마친 뒤, 당신의 앞길이 꽃길이라고 말할 순 없다. 아마 가시밭길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결국 고난을 이겨낼 것이고 성장할 것이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기적을 이룬 셈이니 말이다. 


예비 간호사 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고 앞으로 펼쳐질 매 순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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