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클레어의 브런치 서랍 속의 초안글들은 어떤 모습으로 숨어 있을까요?
실은 이 문제작을 아예 비공개할까 하다 오픈합니다
저도 다른 작가님들 서랍에 있는 초안은 어떤 모습일까 호기심이 생길 때도 있었거든요. 본글은 2주 전엔가 처음 머리에 떠오른 글감을 휘리릭 쓴 상태로, 그야말로 '초안'인점 참고 부탁드려요.
한가지, 제가 오프라인에서는 직장, 가정, 종교공동체 등에서 피스메이커(peacemaker)를 자처하며 도리어 어두운 언어를 쓰시는 분들을 달래고 화해를 주선하는 입장에 주로 서있어요. 사람과 조직에 문제가 보여도 혼자 조용히 끌어 안는 꽤 순종적인 순둥이랄까요.
본 글은 어쩜 오프라인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는 저의 내면에 담고 있는 이야기에요. 어렸을때부터,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낙서글로 마음을 풀던 습관과 비슷한데요. 예전부터 한번 글로라마 속에 품은 생각을 털어 놓고 싶었던 주제이고, 그런 공간이 있어 다행이고 감사해요.
다음에 퇴고를 충분히 한 후 다시 발행할지는 의문입니다. 중세 종교개혁뿐 아니라 어느 시대이든 '건강한' 반동은 세상을 발전시킨다 생각해요 :)
검정콩의 반란
종교개혁의 21세기적 동화적 재구성
하얀콩들이 사는 하얀 나라, 그 나라엔 에퍽탑으로 유명한 도시 화이트빈이 있다. 한때 세계 각처의 관광객들이 오가는 명소중 한 곳이었다. 화이트빈은 독특한 종교색을 갖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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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수장인 거식콩은 하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명목으로 마을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님의 뜻이라며 특정한 의식을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마을에서 추방하거나 신성모독자로 낙인찍었다.
된장나라는 열심히 된장을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치즈나라도 열심히 치즈를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하얀 나라도 열심히 하얀콩을 키우는 일에 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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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님이 인간 세상에 내리는 가장 큰 벌은 고난이 아닐 수 있다. 때론 죄를 지은 자가 겪는 고난은 징벌이 맞지만 그 고난을 겸허히 감당하면 복이 되기 때문이다.
하늘님이 인간 세상에 내리는 가장 큰 벌은 '헛수고'이다.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쏟지만 그 모든 시간과 에너지가 하늘님이 보시기엔 '헛수고' 일때, 그렇게 세월을 허송한 비애의 존재를 일컫는 하늘말이 '허수아비'이다. 하늘님의 신하들은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이른바 가라지콩들을 골라내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 때까지는 내버려 둔다. 허수아비를 가려 내려다가 진짜 콩들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콩을 어떻게 가려 내냐고요? 가라지는 물에 넣으면 떠오른다. 그들의 인생에 물을 쏟아붓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란 물이다. 아무 문제 없이 일상이 루틴하게 잘 살아지게 되면 가라지콩들은 영적으로 나태해지게 된다. 영적 나태는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꽁꽁 잘 숨길 수도 있다. 심지어 열심히 기도하고 종교행사를 다 참석해도 영적으로 나태해질 수 있다. 사람은 얼마든지 숨겨둔 야심을 위해서 종교도 끌어다 열심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얀콩 나라의 화이트빈엔 종교협의체가 있다. 그곳에 의장 3명과 100명의 사목들이 있다. 예전엔 종교가 홀대 받던 나라였다. 선각자가 배를 타고 오면 비난을 받고 심지어 죽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젠 이들 종교협의체는 오히려 기득권이 되었다. 이젠 삼류대학에 갈바에야 종교협의체 들어가는 것이 낫고, 돈 못 벌 바에야 명예라도 가지면 좋겠단 마음, 그렇게 성공과 간혹 운 좋은 부를 쟁취하고자 종교협의체에 입문하는 신입콩들도 있었다.
반면에 전문 종교콩이 아닌 민중콩들 중에선 가끔 종교콩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콩들이 나타나곤 했다. 종교 경전을 자기들보다 더 잘 해석하고, 기도를 하루 5시간씩 하고, 심지어 종교콩들은 오히려 성공에 목말라 있는데, 이 순수한 민중콩들은 애민 곧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수천 년 전 그와 비슷한 콩이 콩세계에 나타났지만 그는 곧 콩이 아닌 초월적 존재 곧 하늘님의 자손임이 드러났던 터였다.
하늘님은 종교콩들의 비릿한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어느 날 민중콩들 중에서 명석한 검정콩에게 계시와 미션을 준다.
"넌 다른 거 말고 자랑만 하거라."
하늘님은 잠시 수천년의 추억을 회상하듯 말을 멈추다가는 이내 입을 여셨다.
"비릿한 종교콩들은 고난의 스토리는 잘도 커닝하고 흉내 내지만 자랑의 독침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고 말지. 내가 종교콩들을 다루어 보니 고난 앞에서도 가면을 잘 쓰던 콩들도, 다른 콩들이 자랑하면 그땐 열폭을 터뜨리며 그 민낯을 드러내고 말더구나.
고상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란다. 그들은 나만 배신하는게 아니라 민중콩들을 호도해 우둔하고 나태하게 만들었지. 경건의 모양 이면에 도사린 종교 성공주의란다.
그런 연유로, 자신보다 더 성공하고 축복받은 민중콩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힘든거란다. 자기의! 그들은 하늘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했다는 '자기의'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일한 목적이 종교적 성공인데도 그것을 '의'라 여기니 황당하더구나. 그런 영적 상태인 종교콩 입장에선 자기 보다 잘 나가는 민중콩, 그것도 종교성이 뛰어난 민중콩을 보니 탕자의 형처럼 분을 내는거란다.
영적 분별력이 있다면, 이 땅의 성공놀음이나 자랑을 불쌍하게 봐야할텐데,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 반증이란다. 종교업무 시간에도 축복콩들을 감시하느라 SNS를 하면서 주일엔 경건의 흉내를 내니, 더 이상 못 봐주겠다. 이참에 그 위선을 드러내야겠구나. 네가 수고 좀 해주거라. 혹여 오해 받더라 핍박을 받더라도 너라면 잘 참고 미션을 완수하리라 믿는다."
아니나 다를까, 검정콩이 자랑을 시작한 이래 하얀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렇게 고상하고 고아하던 종교협의체는 벌집을 쑤신 듯 그간 은닉한 그들의 탐욕, 게으른 영성, 시기와 질투, 깎아내리는 암투, 강단의 자리에서 하늘님이 아닌 자기 언어로 표적 설교하는 표독스럽고 거짓된 내면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미움과 질투의 영에 휘둘러,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민중콩들에게 만천하에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쉬도 때도 없이 검정콩을 어리석고 탐욕 많은 삼류 콩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하늘님은 신실한 종교콩들에게 고난도 주지만 축복도 주신다. 전자는 고난을 통해 순수하게 연단하기 위함이다. 후자는 겉으로 신실한 콩으로 보이지만, 실은 축복이나 성공 자체가 삶의 목적인 가라지콩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난을 잘 견뎌낸 종교콩들은 많지만 축복을 잘 감당하는 종교콩들은 아주 희소하다. 지혜왕 솔로콩이 그 예이다.
비릿한 종교콩들은 겉으론 위엄을 뽐내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콩이 축복콩이 되는 것을 보면 못 견뎌 한다. 축복콩이 기필코 사라져야 잠을 잘 수 있다 여길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종교콩들은 검정콩을 핍박하고 덫을 놓아서, 자신들 목전에서 제거할 수 있다 자신만만했다. 그들이 정작 하늘님의 커다란 플랜 안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강단 밑의 민중콩들은 겸손하고 진실하고 욕심 없는 종교협의체를 바란다. 그들 민중콩들은 삶의 현실에서 욕심을 못다 버려도, 자신들의 종교 콩 리더들은 청빈하길 바라는 거다.
민중콩들이 그토록 열망했건만, 종교협의체를 관장하던 상당수의 종교콩들은 실은 성공, 그것도 종교적인 성공을 가슴에 몰래 품고 희생과 경건의 포장으로 달려 온 것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반면 검정콩은 그들과는 반대였다. 하늘님이 돈과 명예, 가족, 자녀복을 이미 주었지만 하늘님이 원하시면 그것들을 내려놓고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늘님이 검정콩을 축복으로 포장해서 안심하고 자랑 미션을 준 이유였다.
그럼 비릿한 종교콩들은 어떻게 미리 알아볼 수 있을까? 평상시 그들이 지닌 삶의 지향과 관심,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종교콩들은 종교협의체 건물에 매일 청소하려 오는 청소콩들에게 무관심하다. 식당에 음식을 자주 시키는 그들은, 배달콩이 와도 한번도 그들에게 물이나 간식을 준 적이 없다. 종교콩들은 그런 주변에 대한 무관심이 그들 자신의 영적인 상태인 줄도 모른다.
반면 검정콩은 직분 없는 민중콩이었지만 남몰래 그분들을 챙기려 했다. 사비로 콩김밥을 사서 올 때면 건물 1층 안내콩에게 몰래 드렸다. 청소콩들이 그림자처럼 사라지더라고 인사를 하며 존재감을 인정해 주었다. 배달콩들에게는 주머니 속 과자라도 드리려 했다.
종교협의체의 종교콩들은 주변 식당, 상가, 배달콩들에겐 민중콩과 다름없어 보였다. 종교행사 중에만 경건하고 열정어린 그들의 간구는 비릿했다. 수천 년 전 바리새 콩들과 비슷했다. 하늘님이 그들 안에 바리새 기질을 드러내고자 마음 먹었던 두번째 지점이다. 그들이 질투할 모든 조건을 갖춘 검정콩을 준비했고 어느 날 그 존재를 우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종교콩들은 그것도 모르고, 강단을 볼모 삼아 강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곧 자기의 야망을 숨기고 검정콩이 성공주의에 빠졌다는 헛소문을 내고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콩들은 알았다. 그들 종교콩들이 과하다는 것을, 검정콩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민중콩 중에 현자와 같은 통찰콩은 과묵하지만 이 모든 흐름을 꿰차고 있었다. 그러나 훈수를 두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하늘님에 대해 선포해야 할 강단을 사사로이 쓰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영적으로 우둔해졌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누구도 그것을 책망하는 이가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종교콩이 그럴진데 그 밑에 민중콩의 영적인 상태는 얼마나 황량하겠는가, 하늘님의 탄식이 늘어간다.
통찰콩은 생각했다. 종교콩들의 종교 성공주의를 드러내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도 좋을 일이라고 말이다. 영적 대청소를 하시려는 하늘님의 더 큰 그림을 아는 유일한 통찰콩. 그는 노아시대를 보듯 한숨만 연거퍼 내쉬곤 했다.
종교콩들에겐 고난은 때론 액세서리이다. 자기 강단을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허나 성공주의에 빠져있는 민낯이 드러나는 것은 종교콩들에게는 수치이다. 종교 성공주의를 숨기고, 자신이 겸허하고 고상하다 포장하는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은, 자기 밥그릇이 흔들릴 위기이기도 했다. 검정콩을 처단하기 위해 달려든 숱한 종교콩들의 음모와 결탁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종교콩들은, 검정콩이 자랑 미션을 퍼부어 대는 1년여 동안 자신들의 종교 성공주의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라도 이 상황에 대한 통찰이 생겨 스스로 겸비하고 탐욕과 안일-엄밀하게 일은 열심히 하지만 하늘님과의 교제는 소원해진 영적인 안일-을 회개하고 심기일전할 수 있기를, 검정콩은 멀리서 하늘님께 간구했다.
[생생큐티] 2024년 8월 12일(월)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예레미야 2장)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 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아 2:8-1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의 성품과 일하심의 방식, 인간들을 향한 사랑과 섭리를 그 존재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뜻을 널리 전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하며,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도 단단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양식을 잘 공급 받아야 백성들을 잘 먹여야 합니다.
근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은 희한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로, 성경은 반복적으로 그들의 희한한 영적인 상태를 꼬집어 풍자합니다. 그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이끄는 대표성이 있고 동시에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의 샘플이기도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백성의 영적인 상태와 비례할 때가 많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이토록 타락했는데, 백성들이 깨어 있을 수 없고, 그들만큼의 탐욕과 변질은 아니라도 영적인 기초 영양이 고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지도자들을 샘플 삼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엔 백성들의 영적 상태까지 책망하고 챙기고자 하는 마음이 읽힙니다. 때문에, 종교지도자자들의 빈약하고 비릿한 모습은 그저 타도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성도인 나의 영적인 상태와 결부해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하는 그들이 종교행위, 종교행사는 열심히 감당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루는 선지자나 선생님들 도리어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관리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따릅니다.
아무리 문장을 다시 읽어도 끔찍합니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대사기극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상품화해서 직장도 얻고 돈도 벌지만 정작 하나님 자체엔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예리합니다. 이 대목을 오늘날 누군가 콕 집어 말했다면 악성 댓글을 엄청나게 받았을 것입니다. 교회 분열을 조장한다느니 말입니다. 실제로 사사로운 기득권 싸움을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위장해서 교회를 분열시킨 사례도 많기에 아주 틀린 리액션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빈 깡통 같은 영적인 상태, 엄밀하게는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전화통화나 이메일 한번 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하나님과 친한 사이인 것처럼, 어제도 하나님과 밥을 먹은 것처럼 위장하는 사기는 수천 년 전뿐 아니라 오늘날도 횡횡합니다. 특히 종교가 직업이거나 종교를 통해 직장에서 이득을 쟁취하는 상황엔 더욱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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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늘 말씀에선) 종교지도자가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이득을 취하고 이중적으로 섬겼다는 대목이 충격입니다. 그리고 이 충격은 다름 아닌 오래 신앙생활한 내 안에서도 목도 될 수 있습니다. 잔재미, 직장일, 가정일, 급하게 휘몰아치는 하루 일과를 겪다 보면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밀리는 경우도 가끔 봅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13절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은 비단 제사장이나 율법선생, 선지자 같은 사람들만을 타깃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쁘고 유려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물’을 부어 점점 떠오르는 내 삶의 가라지 즉 형식주의, 변질된 영역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런 일상의 바쁨을 핑계 대지 말고 그것을 계기로 경고를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이를 기억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날마다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