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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May 29. 2024

직장 동료인 그의 플러팅  그리고 노빠꾸 고백

2018년 12월, 그와의 첫 식사

[2018년 12월]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빠꾸란 없는 직진형 인간 그 자체


나의 남편, 현우 감독은 밥에 진심인 남자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대식가다. 나는 태어나서 현우 감독보다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두가 자신을 숨기고(?) 예쁘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연애시절에도 그는 단 하나의 내숭 없이 밥 두 세 공기를 뚝딱 해치우곤 했다. 그는 먹는 것을 너무 사랑해서일까. 음식 하는 재주도 타고났다. 촬영 중 어깨너머로 본 레시피를 외워 종종 집에서 수준급으로 재현해내기도 한다. 덕분에 그는 자타공인 우리 집 요리사가 되었고, 제 뜻대로 주방을 마음껏 휘젓는다. (아, 난장판이 된 주방을 치우는 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그렇기에 그가 내게 ‘밥을 사’라고 한 것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닌, 꼭 나를 밖에서 보겠다는! 나와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야 말겠다는! 확실한 의사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뜻을 알 리 없던 나는 한국인이라면 으레 하는 인사말이겠거니 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결국 우리의 식사 자리가 성사되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달이나 더 걸렸다.


2018년 12월. 거리마다 들뜬 분위기가 가득한 연말. 우리는 하필 사람이 미어터지는 연말의 홍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 1시간 전, 나는 거울 앞에서 꽤나 고민을 했다. 예쁜 옷이 아닌 ‘최대한 평범한 옷’을 고르기 위해. 평소 즐겨 입던 원피스를 꺼냈다가 다시 넣어두었다. 괜히 그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차려입었냐고 오해할까 봐. 결국 나는 일터에서 입던 무채색의 슬랙스에 코트를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지금의 나이로썬 상상만으로도 힘겨운 연말의 외출.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몸을 비집고 그를 찾아 나섰다. 그때 저 멀리 익숙한 패딩과 추리닝 차림의 한 남자가 보였다. 아, 그의 행색에(?) 원피스라도 입고 나왔으면 정말 큰일 났겠다고 생각하며, 아는 척을 하려는데. 어라? 다른 여자의 팔짱을 낀 채 그가 사라진다. 당황한 나는 다시 카페 앞을 훑어봤다. 저 멀리 멀끔하게 코트를 걸치고 점잖게 빼입은 현우 감독이 나를 부른다. 에? 웬일이야. 웬일로 제대로 입은(?) 태국인이 나타났다.


그의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어색함에 몸서리쳤다. 얼굴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 얼마나 ‘이건 일이다’라며 다짐했는지 모른다. 마침내 나와 그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숨 막히는 정적에 나는 결국 그를 인터뷰를 하듯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하든 상관없었다. 무조건 쌍따봉에 물개박수를 곁들여 그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나의 리액션에 힘입었기 때문일까. 현우 감독은 최근 자신의 이별 소식과 함께 과거 연애사까지, 그리고 그간 자신의 삶까지 죄다 내게 털어놓았다. 한참이나 무엇에 홀린 듯이 이야기하던 현우 감독은 비로소 두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하고 있지?’라며 놀랐다. 아차. 그에게 어색함을 인지할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나는 급하게 커피 한 잔을 더 마시자며 그를 붙잡고 장장 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식사를 하러 나섰다.


끈질긴 그의 노력으로 성사된 식사. 우린 작은 이자카야에 가서 어묵탕과 함께 술을 기울였다. 사실 현우 감독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약속이 깨졌으면. 그가 다른 송년회 때문에 술병(?)이라도 나서 못 나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생각보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리고 밖에서 만난 그는 아주 조금 젠틀한 면도 있었다. 카페에서의 어색함은 길고 긴 수다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술자리가 깊어갈수록 우리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그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느꼈던 고충은 물론, 싫어하는 스태프의 뒷담화를 시작으로 몇 시간을 깔깔대며 소주를 한 병, 두 병 비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취하지 않으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노력했는데, 현우 감독은 몰래 화장실 가던 길에 컨디션을 사 먹고 왔단다. 비겁한 녀석.


자리가 막바지로 향할 때쯤, 나는 그에게 생각보다 오늘 자리가 재밌다고 인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그 말이 버튼이라도 된 양, 현우 감독의 눈빛이 변했다. 갑자기 내게 ‘마지막 검증’을 한다며 잠깐 손을 잡자고 플러팅을 발사했다. 얘 뭐야?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로부터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고백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 중간 과정) 우리 만나 볼래?”


아마 나는 그때 당황함에 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고백한 사실만 기억날 뿐, 만나볼래? 란 한 마디를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벗어둔 코트를 꺼내 입으며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술김에 이름을 부르며 부쩍 친해졌던 우리는 그의 고백 한 마디에 다시 멀어졌다. 나는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감독님, 내일부터 저 어떻게 보시려고요?” 하지만 현우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노빠꾸, 말 그대로 직진만 아는 남자였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는 계속해서 플러팅을 난사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그와의 다음 식사를 손가락 걸고 약속한 후에야 택시에 탈 수 있었다.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술기운에 취한 것인지 그의 플러팅에 취한 것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현우 감독의 맘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으나, 그럼에도 확실한 건 오늘 하루는 꽤 재밌었다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퍼져 누운 내게 현우 감독이 전화를 했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나는 도통 그 전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자세히 기억도 안 나지만, 다음날 휴대폰을 보니 장장 한 시간을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쏟아낸 것이냐.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는데 메시지가 울린다. 화면에 뜬 현우 감독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기함할 뻔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달콤하게 내게 물었다. “잘 잤어? 속은 좀 어때?” 으악. 감독님. 왜 이래요!


안타깝지만 지금도 남편이 고백했던 그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은 멀쩡했는데 이렇게나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아마 그 순간 기절을 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나와는 다르게 현우 감독은 나에게 고백하던 그날,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맙소사. (100% 뻥이다)


우리는 7년 전 그날의 일을 두고 아직도 티격태격 거린다. 남편의 주장으로는 내가 먼저 진순이(자신이 키우던 진돗개)처럼 실실 웃으며 자신을 유혹했단다. 말만 안 했지,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고. 진짜 나는 억울해 죽을 것만 같다. 그날 남편이 일터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르게 보이긴 했지만, 내겐 그저 잘 차려입은 태국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다. 남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곤 화장대 앞으로 가더니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한다. “이렇게 잘생긴 나를 안 좋아했다고?”


풉. 거울 속 자신에게 빠진 그에게 다시 한번 나의 이상형은 햇볕에 잘 자란 단단한 감자(남편을 같은 이유로 감자라고 부른다)가 아니라, 하얗고 잘생긴 왕자님 같은 스타일이라고 우겨본다. 그럼에도 그에겐 어림도 없다. 여유 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근데 나랑 결혼했지롱~”이라며 “꿈 깨”라는 그에게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다. 아, 나의 왕자님은 어쩌다 감자가 되었을까.   


☑ 남편과의 첫 식사 한줄평: 밥을 먹은 건지, 플러팅을 먹은 건지. 아무튼 배불리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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